[동아광장/이규민]세도를 만드는 정치

  • 입력 2001년 9월 7일 18시 35분


‘미국 콜로라도 덴버공항에서 대통령 전용기가 워싱턴을 향해 날아오를 때만 해도 대통령 보좌관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몰랐다. 다음날 뉴욕타임스는 콜로라도의 명산품 쿠어스맥주 다섯 상자가 전용기에 실리는 사진과 함께 화물의 주인인 이 보좌관이 운송료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말썽이 나자 보좌관은 600달러의 운송료를 냈지만 결국 자리에서는 쫓겨나고 말았다.’

세금에 대한 미국인들의 엄격한 기준을 보여주는 이 일화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같은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정부의 반응은 혹 이럴지도 모른다. “별일 다 보겠네. 비어 있는 비행기 화물칸 좀 썼다고 언론이 왜들 이렇게 생트집이야. 세무조사 받고도 아직 정신들 못 차렸나.”

국민도 별로 호응하지 않을지 모른다. “새만금사업에다 고속전철사업, 의약분업이다 해서 정부가 실정으로 수조원씩 세금을 날리는 판에 웬 항공 운송료 타령인가.”

▼“3분의 1만 써도 될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다. 세금을 눈먼 돈 정도로 여기는 공직자들이 수두룩한데 이런 정도의 보도는 주목의 대상조차 안될 수 있다. 과거 정권에서 대통령수석비서관을 지낸 모 인사는 “정부라는 데 들어와 보니 돈들 쓰는 게 겁이 날 정도다. 제대로만 한다면 3분의 1만 쓰고도 될 것 같은데”라고 체험을 고백했는데 그가 탓한 분위기가 지금이라고 달라졌을까.

며칠 전 세제발전심의위원회에 갔었다. 내년도에는 이렇게 저렇게 세금을 거둬들이겠다는 정부의 세제개편안을 심의하는 자리였다. 이번에도 역시 ‘최소한의 잡음으로 최대한의 깃털을 오리에게서 뜯어내는 과세의 기술’은 유감 없이 발휘됐다. 문제점을 따지는 민간위원들과 이유를 대며 빠져나가는 정부 당국자들 사이의 난상토론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문득 ‘이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하는 상념에 빠졌다.

아무리 좋은 세금제도를 만든들 쓰는 쪽이 혈세의 가치를 잊고 낭비한다면 이 논쟁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시간 국회에서는 추가경정 예산안이 한마디 토론도 없이 본회의를 무사통과하고 있었다. 국민이 피땀 흘려 나라에 바친 5조원 규모 세금의 용처가 불과 몇 초 만에 쓰레기 치워지듯 졸속 처리되는 순간이었다. 예산은 상임위원회에서 심의하고 예결위를 거쳐 본회의에서 처리토록 국회법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이 나라 국회의원들은 그 순간까지 6개 상임위 중 4개는 아예 열지도 않은 채 서둘러 일을 덮었다.

야당이 예산을 무참히 삭감할 것으로 짐작하고 깎일 부분만큼 더 청구해 놓았을 정부만 이게 웬 떡이냐 싶었을 게 틀림없다. 국민의 혈세는 장관해임안을 놓고 벌이는 정쟁에서 발에 거치적거리는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늘 그랬다. 100조원 넘는 세금보따리를 놓고 벌이는 국회 예산심의는 매년 정쟁에 발목잡혀 질질 시간을 끌다가 대충 막판에 (야합에 더 가까운) 타협으로, 각론은 따져 보지도 못한 채 총액기준으로 통과되면서 막을 내리는 게 상례가 됐다.

지난해 예산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검증하는 결산심사는 더 가관이다. 정부가 보고서를 내면 그걸로 대충 그만이니 도대체 어디서 세금이 새어나갔는지를 찾고 고치려는 노력을 국회에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 모른다.

▼예산심의 또 졸속처리 하려나▼

‘무덤까지 따라간다’는 세금 내느라 몽당연필로 가계부를 써가며 아등바등 살고 있는 국민은 그렇게 아껴서 바친 돈이 이 따위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을까.

기획예산처가 이틀 전 내년도 예산안을 청와대에 보고하면서 어김없이 예산국회의 철이 돌아왔음을 알려준다. 계획대로라면 이달말쯤 정부안이 확정되고 이어서 국회가 심의에 들어가야겠지만 목하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의 난타전은 이미 올해도 부실한 예산심의를 예고하고 있다.

DJP가 깨어지느냐 아니냐도, 이한동 총리의 잔류문제로 어떤 소란이 벌어지더라도 납세자인 월급쟁이들은 그 싸움판에만 몰입할 일이 아니다. 내가 낸 세금의 쓰임새를 국회가 제대로 거르는지를 지금부터 두 눈 똑바로 뜨고 지키지 않는다면 국민은 세도(稅盜)를 만드는 정치판의 행태에 방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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