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벚꽃과 사쿠라

  • 입력 2001년 4월 18일 18시 33분


‘벚꽃이 피고/벚꽃이 지네/함박눈인 양 날리네 깔리네.’(한하운) 벚꽃철 한가운데서 옛 시인의 시 한 구절을 생각한다. 흐드러진 벚꽃 아래 깊은 숨을 들이마시면 현기증마저 인다. 꽃에 취한 산문도 있다. ‘벚꽃은 우리 머리를 아찔하도록 흔들어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갈증 같은 것으로 온다. 구름 같은, 아지랑이 같은 벚꽃은 우리의 생명에서 봄과 청춘을 가열하게 증발시키는 마력이 있다.’(손소희)

▷봄빛 가득히 젖은 산야, 거기 피어나는 노란 개나리, 붉은 진달래, 그리고 하얀 벚꽃. 봄은 그렇게 꽃들과 함께 여름을 손짓한다. 그런데 벚꽃만은 유독 또 다른 상념을 부른다. 산은 산이요, 꽃은 꽃일 터이다. 그런데 벚꽃은 ‘사쿠라’를, 그래서 일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일본인이 그 꽃을 지독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일순 봄을 물들이고는 한꺼번에 우수수 지고마는 사쿠라. 그들은 무사정신의 꽃이라고 찬탄한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 함정을 향해 내리꽂힌 가미카제 미사일, 인간폭탄의 이름이 ‘사쿠라꽃’이다. 이 가공할 무기가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전시되어 있다. 그곳은 태평양전쟁의 전몰자 위패가 대부분이니 한국 중국 미국의 눈으로 보면 전범(戰犯)추모장 같은 곳이다. 사쿠라는 신사 안에 나라꽃 국화(菊花)보다 인기 있는 황국의 꽃으로 핀다. 벚꽃말고 ‘사쿠라’는 그래서 섬뜩한 핏빛이다.

▷일본어 사전에는 사쿠라(꽃)말고 또 다른 ‘사쿠라’가 나온다. 노점상과 짜고 물건을 팔아 주기 위한 앞잡이, 청중인 체하는 박수 부대를 말한다. 우리 야당사에 나오는 사쿠라론의 뿌리다. 역시 찜찜한 이미지다. 이래저래 벚꽃에서 비롯한 상념은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만다. 일본은 여전히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바로잡으라는 이웃 나라의 충언을 외면하고 있다. 야스쿠니의 사쿠라 사이로 참배객이 줄을 잇고 총리 후보들은 표를 겨냥해 앞다투어 야스쿠니 참배를 다짐한다. 사쿠라의 핏빛 공격성의 이미지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우리는 벚꽃을 그저 꽃으로 즐기고, 일본을 좋은 이웃으로 두고 싶다. 일본은 ‘가깝지만 먼’ 이웃을 택할 것인가?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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