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아마추어에 맡긴 경제

  • 입력 2001년 4월 6일 18시 40분


엊그제 우리 외환당국간에 코미디같은 일이 벌어졌다. 일이 웬만하면 그냥 웃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한창 환율 때문에 국가경제 전체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던 터에 나온 돌출행동이라 그 모습에 우선 한숨부터 나왔다. 프로들이 잘 해주겠거니 기대하고 있는 국민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일인즉슨 식목일 휴일에 한국은행이 느닷없이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환율 안정을 위해 외환보유고를 동원해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발표하는 태도, 심지어 사용한 단어까지 어쩌면 97년 외환위기 직전의 상황하고 이렇게 똑같을 수 있는지 신기하기조차 하다.

▼적전분열하는 재경부-한은▼

그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발끈하고 나선 재정경제부가 있다는 것이다. 한은 발표를 ‘정신나간 짓’으로 규정하고 “환율 정책은 정부의 고유 권한”이라면서 밥그릇 챙기기를 잊지 않는 모습은 흡사 뒷골목 아이들의 편싸움을 보는 듯하다. 한은의 속셈은 ‘재경부가 우리 고유 권한인 통화정책에 자꾸 간섭을 하니 우리도 한번 해 본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환율이라는 예민한 정책 과제를 놓고 관계 부처간 협의도 없이 ‘시장 개입’을 서둘러 발표한 한은이나 ‘적’들 앞에서 정면으로 부정하는 재경부나 국민의 이익, 국가경제의 어려운 상황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당국이 달러를 쏟아내겠다고 했을 때 그냥 구경만 할 투자가들이 없으니까 환율이 하루 이틀 떨어지는 시늉을 낼지는 모른다. 그러나 국제 외환딜러들이 얼마나 영악한 존재들인가. 이제 직접 개입을 선언한 당국과 국제 투자가들 사이의 한 판 싸움은 볼만하게 전개될 것이다. 불안한 것은 한은의 전략이 처음부터 수가 다 읽힐 만큼 아마추어 수준이라는 세간의 관전평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지면 환란은 또 한번 우리 앞에 공포의 모습을 나타낼지 모른다.

한은이 그런 초강수를 선언한 것은 기본적으로 요즘 외환 상황의 불안이 일부 국제투기꾼들의 시장교란 때문이라는 시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가들은 “한국 경제를 어둡게 전망하는 홍콩의 투자그룹이 선물시장에서 원화를 던지기 때문에 환율이 요동치는 건데 그걸 투기로 보고 있다니 이 사람들이 정말 프로들인지 의문”이라며 경악한다. 한은의 원인 분석이 잘못됐다면 이미 싸움은 승패가 난 것이기에 불안감은 더 커진다.

자유변동 환율제에서 외환 담당자들은 조자룡의 헌 칼 쓰듯 시장 개입의 유혹을 자주 받게 마련이다. ‘말 한마디 하니까 꺾이더라’는 자기 도취에 빠져 개입을 자꾸 언급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시장이 말을 듣지 않는 법이다. 이 때는 진짜 달러를 쏟아내도 외국 투자가들에게 싼값에 달러를 사는 기회만 제공하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만 연출된다는 것이 국제시장의 상식이다. 그런 사례는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된다. 바로 97년의 환란 때 우리가 취한 바보같은 짓이 가장 좋은 사례에 해당한다.

지난 99년 달러 강세가 지속돼 세상이 아우성칠 때 미국 정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책을 촉구하는 여론의 빗발치는 공세에도 일언반구 대응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 행정부는 전격적으로 20억달러를 풀어 버렸다. 시장을 즐기던 투자가들은 폭락하는 달러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지만 이미 엄청난 상처(손실)들을 입고 난 뒤였다. 그 후 투기꾼들에게 미 정부를 상대로 장난하는 것은 금기가 됐다. 우리와 비교할 때 얼마나 장쾌한 전략인가.

▼너무 말이 많은 외환당국▼

그런 정책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미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맡고 있던 루빈이 있었기 때문이다. 골드만 삭스 회장을 지낸 월가(街)출신이었기에 그는 시장의 원리를 잘 읽고 있었다. 외환당국자가 얼마나 말을 아껴야 하며 얼마나 행동을 신중하게 해야 하는지를 그는 시장의 체험으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환시장은 그 의외성 때문에 예고를 하고 나면 탄환을 많이 써야 하는 속박을 받는다. 그런 부담 때문에 웬만해서는 당국이 개입 의사를 밝히지 않는 게 관례다. 전문가들이 외환정책을 심지어 예술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그 미묘하고 예민한 속성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한은은 그것도 머리를 쓴 것이라고 휴일에 느닷없이 개입을 선포하고 말았다. 이런 아마추어들에게 우리는 통화정책을 맡기고 있고 국민은 오늘도 경제가 잘되기를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례에서 보듯 일이 잘못되면 그들은 무사하고 고통은 국민의 몫이 될 것이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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