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육아전쟁]애는 누가 키우나

  • 입력 2001년 3월 12일 18시 36분


《맞벌이 부부 가정이 경제활동을 하는 전체 가정의 40%에 이르고 있다. 젊은층 맞벌이 부부의 최대 고민이자 관심사는 '내 아이 키우기'다.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이제 맞벌이는 우리사회의 큰 흐름이 돼버렸다. 때문에 시부모와 친정부모, 처제집에 아이를 '떠 맡기는'차원을 넘어 사회가 제도적으로, 정책적으로 이문제를 적극 풀어나갈수 밖에 없다. 》

▼못믿을 보육현실…굿바이 직장▼

“축하해. 고추 달렸어?”

“아니.”

“그런데 애는 누가 보니? 친정 부모님이나 시부모님이 봐주신대?”

“….”

최근 첫 딸을 낳은 맞벌이 여성 신모씨(30·서울 동작구 신대방동)는 요즘 걱정이 태산이다. 출산 휴가는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누구한테 아이를 맡길지 정하지를 못했다.

“친정 엄마는 건강이 좋지 않고, 시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사람을 쓰자니 80만∼100만원을 줘야 하는데 돈도 돈이지만 믿을 만한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예요. 죄송하지만 친정 엄마께 맡기고 파출부를 부르는 길밖에는 없을 것 같은데….”

이달초 아들을 낳은 은행원 김모씨(29·여)도 갓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이 착잡하다. 2개월간의 휴직기간이 끝나면 아이를 시부모님이 계신 부산에 내려보내야 한다. 일단 아이를 맡긴 뒤 직장생활을 하며 남편과 함께 주말마다 내려가 볼 생각이지만 둘 다 바쁜 직장생활에 시달리면서 과연 한 달에 몇 번이나 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글 싣는 순서▼

- (상)애는 누가 키우나
- (중)직장의 '미운 오리새끼'
- (하)육아 후진국 언제까지

지난해 인터넷 맞벌이 부부 사이트인 ‘투인컴’이 500쌍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 10쌍 중 4쌍은 부모(친정 시부모 포함)가 아이를 봐주고 있다.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기면 불안하다는 이유 때문. 부모님과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어 아이와 ‘생이별’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요즘에는 노부모들이 건강상의 이유로, 또는 남은 인생을 손자 손녀 뒤치다꺼리하면서 ‘허망하게’ 보내기 싫다는 이유로 아이 맡는 것을 꺼리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 때문에 갈등도 생긴다. “요즘 애 봐주는 시어머니가 어디 있느냐. 나도 자유롭고 싶다”는 ‘이유 있는 항변’에 맞벌이 여성의 가슴은 철렁한다. 애 키우는 방식에 불만이 있어도 꾹 참는다.

가족 같은 베이비시터를 구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최근 직장을 포기한 모 방송사의 한 여성 라디오PD의 얘기. “낮에 우연히 집에 갈 일이 있었죠. 초인종을 눌러도 응답이 없기에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아줌마는 없고 아이 혼자 자고 있었죠. 그런데 아무리 아이를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수면제를 먹였더군요. 그날만 생각하면 온 몸이 떨려요.”

아이가 두세 살이 되면 어린이집의 문을 두드려 본다. 그러나 한국에서 육아는 철저히 ‘개인의 문제’로 돼 있기 때문에 여의치 않다. 구립이나 시립 어린이집은 대개 1년을 기다려도 대기자 명단에만 올라 있을 뿐이다. 워낙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

맞벌이 부부의 가장 큰 걱정은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제대로 크고 있는지에 대한 불안감.

“두세 살까지의 영아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아이 얼굴 보기도 힘드니…. 남들은 무슨 육아모임이다 해서 아이들 데리고 박물관도 가고 미술관도 가는데 우리 아이는 그냥 이렇게 키워도 괜찮은지 모르겠어요.”(증권사 여직원 김모씨)

이는 죄책감으로 연결되고 심할 경우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아이를 위해 과감하게 직장을 그만두는 ‘육아 U턴 현상’도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 일반적이지는 않다. 최근 몇년간의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맞벌이 여성의 10명 중 8명은 ‘자아실현’보다는 ‘생계형’이다.

“대개 육아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 일과는 굿바이 해야 합니다. 나중에 재취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대졸자도 3명 중 1명 정도 취업이 되는 상황에서 애 키우고 나서 ‘나 이제 일하고 싶어요’ 하면 어느 회사에서 써주겠어요.”

일을 마친 뒤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 준비하고 아이랑 놀다 파김치가 돼 잠드는 일상을 반복하는 맞벌이 여성이 유일하게 기댈 곳은 남편의 가슴. 그렇지만….

맞벌이 부부 사이트 ‘마주벌이 사랑일기’(cafe.daum.net/doublylove)에서 퍼온 글. “일찍 퇴근해 콩나물 무 과일 자반고등어 등을 사가지고 맛있게 저녁을 차렸지요. 설거지를 하고 애들 학습지를 도와주고 나니 녹초가 되더라고요. 남편은 밤 12시까지 텔레비전만 보고. 다음날 아침 남편이 주말에 친구 만나러 지방에 간다고 하더군요. 저도 주말에 회사일로 바쁜데. 나는 친구들 만나기가 정말 힘든데 남자들은 만난 지 오래됐다며 지방을 오가면서까지 친구를 만난대요.”(원더우먼의 분노)

▼맞벌이 아이 맡길곳 없다▼

“맞벌이 부부들이 세금은 두 배나 내는데 왜 육아 문제는 철저히 ‘개인 문제’로 떠넘기죠?”

맞벌이 여성 김모씨(30)는 정부의 ‘육아 정책’을 한마디로 이렇게 꼬집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맞벌이 가구와 부부 어느 한쪽만 돈을 버는 ‘홑벌이 가구’의 비율은 4 대 6 정도. 2000년 조사는 분석 중이지만 95년 통계로는 맞벌이 318만 가구, 홑벌이 529만 가구였다.

맞벌이 부부의 최대 고민은 탁아를 포함한 육아 문제다. 특히 생계를 위해 또는 자아실현을 위해 직장을 가진 여성의 상당수가 직장에서 “애 혼자 키우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눈치를 봐야 하고 집에서는 살림하랴, 아이 돌보랴 말 그대로 ‘슈퍼우먼’이 돼야 한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인 여성 최모씨(29). 집 근처에 어린이집이 없어 매일 전쟁 치르듯 친정에 아이를 맡기곤 한다.

“오전 6시에 일어나 11개월된 딸에게 우유를 먹이고 아침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때우고 허겁지겁 자동차로 20분 거리의 친정에 가 아이를 맡깁니다. 오후 8시경 퇴근해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 이유식을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랑 놀다 잠이 듭니다. 매일같이 회식이 있다시피 한 남편은 술에 취해 밤 12시경 초인종을 누르기 일쑤고….”

최근 2개월간의 출산 휴가를 마치고 출근한 회사원 박모씨(32·여)가 상사로부터 들은 얘기 한토막.

“출산휴가 두 달도 길다. 두 달이나 쉬고 나오면 일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지 않나?”

최근 10년새 어린이집 놀이방 등은 급속히 늘어 2만개에 이르지만 시설과 프로그램 측면에서 만족스러운 곳은 많지 않다. 시 군 구립 어린이집은 지난해 6월 현재 1285곳(10만1059명)으로 전체 어린이집 1만9320개 중에서 6.7%에 불과하다. 100일이 지난 아이를 맡길 만한 시설은 거의 없고 있다 해도 들어가기가 바늘구멍이다.

제도적으로는 ‘육아휴직제’가 있지만 이를 활용하는 맞벌이 여성은 드물다. 12일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육아휴직장려금(1인당 15만원, 올해는 20만원)을 타간 업체는 401곳(5인 이상 사업장 31만7266곳의 0.1%)에 불과하다. 인원은 고작 2226명. 무급인데다 승진 문제, 사내 분위기 등이 복잡하게 얽혀 신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5세 이하 영유아를 둔 기혼 여성의 취업률은 상대적으로 낮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 박사는 “지난해 전국 1만3000가구 대상 조사에서 5세 이하를 둔 맞벌이 가구가 27.3%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출산휴가를 60일에서 90일로 늘리고 육아휴직 때 개인에게도 고용보험 기금에서 임금 30%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을 골자로 한 모성보호법 개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중이다. 재계는 “기업부담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사회가 공동 부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경총 이호성 사회복지팀장)며 반대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정용관기자(팀장·이슈부)

박윤철 김준석기자(이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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