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훈/일 안하면 책임없다?

  • 입력 2001년 2월 19일 18시 49분


최근에 만난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대우자동차 처리와 관련해 이런 말을 했다.“의사가 수술을 할 때 보호자로부터 수술 동의서라는 걸 받잖아요. 요즘 공무원들이 그런 심정이에요.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할 때 나중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라도 받아야지, 어떻게 하든 욕을 먹을 게 뻔한데 책임지고 일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 대우자동차는 노조와 채권단이 힘 겨루기를 하는 사이 하루 36억원씩 은행빚이 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팔짱을 낀 채 구경만 하는 형국이다.

물론 정부 관계자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재작년 제일은행을 뉴브리지캐피털에 5000억원에 매각한 이후 정책 결정자들은 국정조사, 감사원 감사, 청문회 등에 불려다니며 헐값으로 매각한 이유를 추궁당했다. 지난해 우선 협상자로 지정됐던 포드가 대우차 인수를 포기한 직후엔 대통령이 나서 ‘매각 실패 책임자를 가려내 책임을 물어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 처리가 끝나면 책임만 추궁하는 분위기가 공무원들에게 넌더리가 날 만도 한 일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다. 작년 10월 말 현재 대우차의 총 부채는 19조원.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나마 인수 의향을 보이고 있는 GM마저 손을 뗄 가능성이 높다. 20조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대우차 손실은 이 경우 고스란히 국민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채권단과 노조를 모두 만족시키면서 아주 좋은 가격에 신속히 처리하라’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황당한 주문을 하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차라리 게으르다는 비난을 받는 게 낫다며 일 처리를 차일피일 미루는 공무원을 책임감있다고 할 수는 없다. 대우차뿐만 아니라 대한생명이나 현대투자신탁의 매각 문제도 이 같은 공무원의 보신주의 때문에 매듭이 지어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막강한 ‘정책 권력’은 달게 즐기면서도 뒤탈이 무서워 책임 회피적인 행태를 보이는 공무원. 국민이 ‘면책 보증서’라도 써줘야 이들이 ‘메스’를 잡을 것인가.

<이훈기자>dreamland@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