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과 서의 벽을 넘어]"일 전후세대에도 전쟁책임 있다"

입력 2001-01-28 18:44수정 2009-09-2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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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 타카하시 교수

일본 전후세대의 전쟁책임론을 주장하는 도쿄(東京)대 타카하시 테츠야(高橋哲哉) 교수. 올해 45세인 그 자신도 전후세대다.

그에게 동과 서의 벽은 동양 전통과 서양 근대 사이의 벽이 아니다. 동양의 근대를 억압해 온 유럽 중심주의가 벽일 뿐 아니라, 1990년대부터 급부상하고 있는 일본의 네오내셔널리즘(Neo―nationalism) 역시 또 하나의 벽이다.

◇정의로운 인간관계 회복 주창

“기존의 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기울이며,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질러 온 폭력과 억압을 제거해 나가면서 정의로운 인간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타카하시 교수의 이 같은 ‘전후책임론(戰後責任論)’ 앞에 동과 서는 하나가 된다.

‘유태인 대학살’의 증언을 다룬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9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쇼아(Shoah)’는 1985년 유럽에서 처음 상영된 이후 각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또 1991년 한국의 김학순 할머니가 ‘종군위안부’ 피해자임을 스스로 공개한 후 한국에서만 약 160명, 동아시아 전체에서는 수 천 명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기 이름을 밝히며 일본의 만행을 고발해왔다.

◇데리다의 '탈구축이론' 바탕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난 두 사건은 일본인으로서 서양철학을 공부하며 유럽 중심주의에 대해 회의해온 저에게 피할 수 없는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후책임론’에 이르게 됐어요.”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까지 그가 집중적으로 파고든 것은 철학자 후설의 현상학이었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와 학문의 근본 관계를 문제삼았던 후설이나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 등 현상학계열

의 학자들조차 유럽 중심주의적 편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일 네오내셔널리즘 호되게 비판

타카하시 교수가 돌파구를 찾은 것은 자크 데리다의 탈구축 또는 해체(deconstruction) 이론이었다. 하지만 모든 가치의 탈구축(해체)을 지향하는 데리다의 이론으로 일본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처럼 현실의 모든 것을 가볍게 부정해 버린다면 단지 데리다를 이용한 지적 유희에 빠지는 것일 뿐이었다. 그는 데리다 자신이 이런 문제점을 느끼며 1990년대 후반부터 말하기 시작한 ‘탈구축 불가능한 것’에 주목했다.

“그것은 바로 ‘정의(justice)’였습니다.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법이 필요불가결하지만, 인간 사이에 타협점으로 만들어진 법으로부터 ‘배제된 타자’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기존의 법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데 법의 정의가 있고, 법 해체의 의미가 있습니다.”

타카하시 교수는 일본의 경우 네오내셔널리스트들이 배제하려는 군국주의 희생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내에서는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족 등에게, 국외에서는 식민지배와 종군위안부 등으로 억압받고 희생당한 아시아인들에게 귀기울일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탈구축이론은 내셔널리즘을 비판해 온 근대 일본 지식인의 전통과 만남으로써, 아시아 각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일본 내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건설하려는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타카하시 교수 약력

△1956년 후쿠시마(福島)현 출생

△1978년 도쿄대 프랑스학과 졸업

△1983년 도쿄대 대학원 박사 수료(철학전공)

△현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학과 교수

△저서―‘기억의 에티카:전쟁·철학·아우슈비츠’ (1995), ‘데리다:탈구축’(1998), ‘내셔널 히스토 리를 넘어서’(삼인·1998),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묻는다’(역사비평사·원제 ‘戰後責任論’·1999),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전쟁의 기억에 관한 대화’(2000) 등 다수.

<도쿄〓김형찬기자·철학박사>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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