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이삐 언니 "모든 걸 사랑해야지"

  • 입력 2000년 11월 24일 18시 53분


‘나는 나를 이끌어 온 길을 믿었다.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모르지만 길은 결코 나를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다소 관념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 문장이 ‘이삐 언니’ 안에서는 생생한 생명력으로 살아난다. 그 길을 다 걸어온 사람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깊이와 여유가 책 곳곳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제 예순을 훌쩍 넘긴 저자. 젊은이들이 숨이 넘어갈 듯 자기의 문제를 털어놓을 때, 여유있는 미소와 따뜻한 눈빛만으로 그들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음을 삶의 깊이라고 하던가.

이 책은 동화로서는 중편이라 할 만한 길이의 작품 6편이 연작으로 되어 있다. ‘복이’라는 여자 아이가 커가면서 조금씩 배워가는 삶의 비밀은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 마음이 놓인다. 큰 길이 아닌 샛길에서 만나는 많은 단상들, 수다스럽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채워가는 많은 등장 인물들, 일단 걸어 온 길은 끝까지 가야만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진리, 인간을 둘러 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 이런 것들이 쉽고 말끔한 문체와 촘촘한 묘사 때문에 더 가슴에 남는다.

해방 전후 무렵, 밤남정이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하지만, 오십년이 넘은 지금도 전혀 낯설지 않음은, 고향에 대한 향수라기 보다는 인간의 삶은 어느 때나 같은 진리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산다는 건 그런 걸 게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면서, 할아버지처럼 절대적인 힘을 따라, 되돌아 갈 수도 없고, 가끔은 ‘소달구지’의 도움도 받으며 월이처럼 내가 돌봐야하는 어떤 것과 함께 하는 걸 게다.’ (이 책에 수록된 동화 ‘봄이 오는 날에’ 중)

이제 막 사춘기를 맞이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읽고 앞으로 자기가 살아갈 삶의 모습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읽기에 긴 호흡이 필요한 책이지만, 책읽는 힘을 지닌 아이들만이 맛보는 뿌듯함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 이삐 언니 / 강정님 글/양상용 그림/208쪽/6000원 푸른책들 ▽

김혜원(주부·36·서울 강남구 수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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