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의 옛날신문읽기]자유부인에서 젖소부인까지

  • 입력 2000년 11월 24일 16시 21분


자유부인
일전에 무슨 일로 영화감독 한분을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과 이런 저런 말을 나누다 들은 얘긴데, 그분 말씀인즉 “나는 어떤 영화를 만들든 제목을 미리 정해놓고 시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목을 미리 근사하게 정해놓고 시작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뭐든 술술 풀린대요. 근데 제목이 자꾸 된고구마 목에 걸린듯 신경쓰이기 시작하면 결과도 신통찮더랍니다.

아닌게 아니라 충무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영화제목을 정하는데 적게는 수십개, 많게는 수백개의 후보들을 올려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지요.

눈치채셨겠지만 오늘은 영화제목 얘깁니다. 1987년 5월19일자 경향신문 기사죠. 제목은 ‘영화제목에 비친 「여성상」변화'로군요.

<5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만들어진 한국영화 가운데 「여자」「여인」「부인」등 여성을 지칭하는 제목의 영화가 무려 87편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영화진흥공사가 마련한 「한국영화에 비친 여성상 재평가」 조사작업 결과 밝혀진 것.

이번 조사에 따르면 이들「여자」를 소재로 다룬 영화는 50년대 8편, 60년대 25편에 지나지 않던 것이 70년대 들어 38편으로 부쩍 늘어나 현재까지 54편이나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을 보면 성적의미를 상징으로 내세운 것이 대부분.

드라마의 구성면에서 연대별로 구분해보면 50,60년대에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되 남녀 삼각관계의 비극적 주인공이나 비련의 사연을 그리는 대상이었으나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섹스의 대상이나 에로티시즘물로 바뀌었다.

세월에 따라 더욱 노골적이며 선정적인 것으로 변화됐으며 은근하게 표현하던 여체의 아름다움도 완전히 노출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후략)>

기사는 이어 영화들을 제목별로 분류하고 있군요.

「....여자」 영화 : 「내가 버린 여자」(77) 「색깔있는 여자」(80) 「아침에 퇴근하는 여자」(79) 「집을 나온 여자」(71) 등 36편.
「....여인」 : 「아름다운 여인」(59)「가을에 온 여인」 (69) 「밥을 먹고 사는 여인」(85) 등 28편.
「....부인」 : 「백사부인」(60) 「안개부인」(71) 「쥐띠 부인」(71) 「복부인」(80) 등. 「자유부인」서 「애마부인」까지 23편.

어떴습니까. 재능만 있다면 영화제목 한 가지만 갖고도 읽을만한 풍속사책 한권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복부인」은 부동산투기 여사에 관한, 「아침에 퇴근하는 여자」는 저녁에 출근하는 여자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잖아요.

그런데 경향신문의 기자는 70년대 들어 선정적인 영화가 전시대보다 더많이 만들어지고, 내용 또한 훨씬 노골적으로 변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한국영화사에서 70년대는 `불행의 연대'로 기록되고 있지요.

유신정권은 갖가지 검열의 자를 들이댔고 그로 인해 표현의 자유는 위축될 대로 위축됐습니다.

그 결과 함량미달의 영화가 양산됐지요. 영화산업은 60년대보다 오히려 퇴보했죠.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하니까 영화인들은 돌파구로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영화들 가운데 ‘영자의 전성시대' ‘별들의 고향'은 그나마 수작이었고요.

이런 배경에서 기자는 한국영화가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섹스의 대상이나 에로티시즘물로 바뀌었>고 <세월에 따라 더욱 노골적이며 선정적인 것으로 변화됐> 다고 ‘회고'하고 있는거지요.

늘보 <문화평론가>letitb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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