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칼럼]‘사정 정치화’ 좋지 않다

  • 입력 2000년 11월 15일 18시 51분


사정의 본래 취지는 옳다. 법을 어겼으면, 더구나 법 준수의 모범이어야 할 공직자가 부정부패나 비리를 저질렀으면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정부와 여당이 공직사회에 대한 ‘강도 높은 사정’을 외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의를 제기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부가 일을 잘한다고 생각해 박수를 치고, “이제는 나라가 바로 서겠구나”하는 감동마저 느끼며, 심지어 “나도 조심해야지”하면서 두려움조차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이 ‘강도 높은 사정’을 외치는 오늘날 국민 사이에선 기대도, 감동도, 두려움도 찾기 어렵다. “사정은 또 무슨 사정? 뻔한 얘기지”라는 냉소가 고작이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인식한다. “정권이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 있구나. 민심이 많이 떠났구나. 그래서 여론 수습의, 또는 국면 반전의 돌파구를 사정에서 찾고 있구나.”

우리 정치사를 돌이켜 보면, 특히 박정희 대통령 이후 역대 모든 정권은 사정을 ‘총체적 위기’의 돌파를 위한 무기로 써왔다. 말하자면 사정이 정치화(政治化)한 것이다. 이 점은 사정을 청와대가 직접 맡아 온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대통령의 정치적 목표와 의도에 맞춰, 이른바 통치방향의 큰 그림에 따라 사정비서실이 수사계획을 짜고 거기에 맞춰 일선 검찰을 지휘해 오지 않았던가.

바로 이러한 통치관행에서 검찰의 정치화, 법의 정치화라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전통이 세워졌다. 법에 따른 사정이라면 사정이 특별히 강조되는 시기가 있을 수 없다. 그것도 검찰권 행사자도 아닌 여당 대표가 사정이 임박했음을 예고할 필요가 없다. 범법행위가 발생한 즉시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따라야 할 것이고, 거기에 따라 기소가 됐으면 재판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경우에는 ‘사정 국면’을 엶으로써 난국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집권층의 정치적 필요에 맞춰 수사와 기소 등의 사정 과정이 펼쳐지다보니 사정이 강조되는 특별한 시기가 따로 설정되는가 하면 ‘선별적이면서 편파적이고 편의적인 법 집행’이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관행처럼 자리잡고 말았다는 뜻이다.

사정이 별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이다. 역대 정권이 벌였던 그 숱한 사정을 통해 유죄가 확정됐던 고위공직자나 정치인치고 사면복권되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들은 보통 구속으로부터 두세 해 안에 석방과 사면복권의 길을 밟은 뒤 정치권과 권부에 복귀해 위세를 떨치고 있지 않은가.

‘사정 강조 기간’이 선포된 경우의 일선 현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고 한다. 사정기관이 이미 자세히 파악하고 있던 건(件)들 가운데 몇 가지를 가려 발표하면서 사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모양을 취하는 관행이 그것이다. 그러니 이 때 잡혀든 쪽은 “재수없게 걸렸다” 또는 “시국의 희생양이 됐다”고 생각할 뿐 도대체 반성의 마음을 갖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공평성에 기초한 법의 존엄성을 찾기 어려움은 물론이다. 앞뒤가 이렇다 보니 사정의 일선현장에 선 검사들 중에서도 통 기분이 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조선왕조 말기의 일이다. 세도가들의 탐학으로 민심이 흉흉하던 때 당시의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이 ‘청년 정객’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에게 “조선 8도를 놓고 한 도에서 대표적으로 한 명씩, 그러니까 감사(監司) 여덟명을 잡아올리면 민심이 가라앉을까”하고 물었다. 대담한 해학을 통해 정곡 찌르기로 정평이 났던 월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덟 명이 필요없죠. 세 명만 잡으면 됩니다. 그 세 사람만 잡으면 천하가 임금님 명령의 지엄함에 두려워 떨 것이고 민심이 곧바로 임금님을 믿게 되죠.” 김총리가 세 사람만 잡아도 된다는 말에 반가워 그게 누구냐고 묻자 월남은 “영의정과 좌―우의정 등 세 정승”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대화도, 사정도 거기서 끝났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국운도 끝났다. 진정 사정으로 민심수습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가. 핵심을 잡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것이 글자 그대로 정면돌파다.

김학준<본사편집·논설상임고문>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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