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DJ의 딜레마

  • 입력 2000년 11월 6일 19시 29분


겨울의 문턱, 스산한 풍경처럼 우울한 세상이다. 사회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그 어떤 희망의 상상력도 끌어내기 어렵다. 6·15 남북정상회담의 감격은 이미 먼 옛일 같고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경축하는 거리의 플래카드도 빛이 바랬다. 수많은 실업자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나올 것이고 짙어진 불황의 그림자는 길고 추운 겨울을 예고하고 있다. 어차피 견뎌내야 할 시련이고 내년 2월까지는 이른바 4대 부문의 개혁을 완료한다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신뢰에 대한 불확실성은 내일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 ‘召命의식’과 현실정치▼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여권의 한 고위인사는 얼마 전 필자와 함께한 자리에서 ‘DJ의 소명(召命)의식과 현실주의 정치’에 대해 얘기했다.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 정권에서 두 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던 DJ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민주화와 남북의 평화통일이란 역사적 과업을 이행하라는 명을 내리셨다”는 강한 소명의식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반면에 DJ는 “누구보다 철저한 현실주의 정치인이어서 소명과 현실정치 사이에 모순이 빚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이 인사의 조심스러운 진단이다.

민주화와 남북문제에 대한 DJ의 ‘소명의식’에 의문부호를 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노벨평화상이야말로 그에 대한 입증이 아니던가. 남은 것은 ‘현실주의 정치’다. 물론 현실을 떠난 정치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실주의 정치 그 자체를 문제삼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DJ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DJP연합에 매달린 것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DJ의 ‘민주화’가 반(反)독재의 좁은 개념에서 제도와 시스템으로서의 민주화로 확장되지 못한 가운데 현실정치와 맞물려 간 데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DJ가 집권 후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청와대와 내각 및 당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내각은 종속물이었고 당은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모든 국정을 대통령이 일일이 챙겨야 하는 ‘DJ 의존도’는 심화됐다. 결국 시스템으로서의 민주화가 진전되지 못한 채 그 부담은 DJ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개혁이 안돼도 DJ 탓, 심지어 주가가 떨어져도 DJ 탓이 된 것이다.

소수정권으로서 입법부의 수적 우위에 집착한 것은 보다 치명적이었다. 집권세력의 눈에 야당인 한나라당은 ‘반개혁적 수구세력’이었고 이들의 ‘발목잡기’를 피하기 위해 국회의 수적 우위 확보는 절대적 과제였다. 집권초기 야당의원 끌어들이기가 시도됐고 4·13 총선을 앞두고는 표를 위해 모든 개혁이 중단되거나 유보됐다. ‘IMF 위기’의 근원은 그대로인 채 ‘IMF 관리체제 졸업’이 위기의 완전극복으로 부풀려졌다. 그러나 총선 결과는 패배였고 자민련 17석을 붙잡아두기 위한 국회법 날치기가 자행됐다. 국회는 파행을 거듭하고 개혁은 혼선을 빚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어둡고 추운 겨울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바른 길인가, 그릇된 길인가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DJ가 남은 임기 동안 그의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고 본다. 남북문제에서 DJ가 이뤄낸 성과는 ‘역사적’이다. 그러나 남북이 진정한 평화공존과 통일의 길에 이르기까지는 겨우 첫발을 뗀 셈이다. 멀고 험하고 위태로운 길이다. DJ는 그 초석을 다지는 것만으로도 그의 소명을 다하는 셈이다. 그러려면 경제가 살아야 하고, 경제를 살리려면 개혁을 해야 한다. 이 두 과업만으로도 노(老)대통령의 어깨는 무겁다.

우선은 오래 전에 약속한 대로 당권을 내놓아 집권여당의 자율성과 국회의 독립성을 높여야 한다. 민주당 내의 자유경쟁으로 ‘이회창(李會昌)의 대항마’가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살고 사회가 활력을 얻는다. 정권재창출은 그 결과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DJ는 백범 김구(金九)선생 51주기 추모식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그것이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비록 비현실적이라 하더라도 바른 길이라면 주저 없이 걸어야 한다. 시대와 역사가 원하는 길이라면.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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