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명섭/국정원 대북역할 신중해야

  • 입력 2000년 10월 19일 18시 47분


대북 협상 과정에서의 국가정보원장의 위상과 역할을 놓고 국회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17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한나라당 소속 정보위원들은 9월 김용순(金容淳) 북한 대남담당비서의 서울 방문 때 임동원(林東源) 국가정보원장이 보여준 행보에 대해 ‘자기 직무를 유기하고 마치 비서실장처럼 거의 매일 김용순을 수행하다시피 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임원장이 대통령 특보로서 대북 협상대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은 ‘원장 차장 기획조정실장은 다른 직을 겸할 수 없다’고 규정한 국가정보원법 8조를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반해 민주당 소속 정보위원들은 국정원장 자신을 포함한 국정원이 북한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 집단이고, 협상의 초기단계에서 비선라인의 활용은 불가피하며, 남북관계는 격식과 형식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며 야당의 비판을 반박했다. 이들은 겸직금지조항에 대해서는 과거에도 국가정보기관 책임자들이 대북 특사역을 수행한 전례가 있는 만큼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장의 역할 규정은 결코 당쟁적 차원에서만 해석될 수 없는 국가적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여야간 논란에서는 국가정보기관의 장기적 위상에 대한 비전은 찾아볼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첫째, 여야는 모두 국가정보원과 대북첩보공작기관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가정보원의 설립 취지는 해외정보의 수집과 분석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이름 그대로 국가적 인텔리전스를 공급해주는 데 있다(인텔리전스는 분석과 검증 및 판단을 거친 종합적인 인포메이션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는 과거 대북업무와 국내정치업무가 과도하게 돌출되면서 해외파트의 기능이 저하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정원 내부에서도 국내정치업무에서 손을 떼고 북한파트와 해외파트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안보 위협이 존재하는 한 국정원 체계를 바꿀 수 없다는 주장이 관료적 기득권 의식과 결합돼 현재와 같은 조직체계를 온존시켜 왔다. 따라서 적어도 현재의 조직체계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장은 결코 북한파트만의 책임자가 아니다. ‘고삐 풀린 세계화’의 시대가 매일 강요하고 있는 수많은 국가적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가적 인텔리전스를 제공해야 할 국가정보 총책임자로서의 소명도 안고 있다.

둘째, 근대적 국가의 힘은 조직의 적절한 분화와 통합에서 나온다는 기본적 원칙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기밀이 없는 나라는 속을 드러낸 빈 지갑처럼 허망한 법이며 외교관계에 있어서 비선라인의 효율성이 발휘되는 것은 초기 단계에 한해서이다. 비선라인의 활동이 적절한 분화와 통합의 원칙에 입각한 조직의 힘과 결합되지 않았을 때,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이미 ‘상부의 뜻을 받들어’ 비선라인이 만들어낸 1972년의 7·4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경험한 바 있다.

셋째, 국정원장은 남북한간의 화해 협력 이후까지도 염두에 둔 장기적 국가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국가적 인텔리전스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만 중동평화협상의 대표로 나서지 않는 이유는 항상 평화협상 이후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많은 국민이 갖고 있는 남북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남북화해에 대한 정서적 공감도에는 훨씬 못 미치고 있다. 남북한이 함께 헤쳐나가야 할 미래의 세계상은 너무나 불투명하다. 한국의 국가정보기관은 더 이상 과거처럼 미국과의 정보 공유를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세계적 도청시스템인 에셜론에 대한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는 유럽국가들처럼 독자적인 역량을 갖추는 데도 한계가 있다.

국정원장의 역할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국정원이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하는 것을 넘어서 과연 그 이후까지를 염두에 둔 국가적 인텔리전스의 중추 역할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명섭(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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