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의 세상스크린]성실?중요하죠, 그러나 지혜가 없다면…

  • 입력 2000년 10월 9일 19시 08분


13년전 영화 ‘칠수와 만수’를 촬영할 때의 일입니다. 안성기 선배가 연기한 ‘만수’와 제가 연기한 ‘칠수’가 포장마차에서 각자의 아픔을 숨긴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전날 밤부터 대사를 달달 외웠던 까닭에 촬영할 때 대사가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너무 달달 외웠기 때문인지 연기가 습관처럼 되어버리고 ‘칠수’의 아픔을 그다지 느끼지 못해, 촬영장에서 속으로 약간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 연기는 연극처럼 무대에 한 번 올려지면 끝날 때까지 한 호흡으로 쭉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에 쫓기는 TV드라마 촬영에 비해 다소 여유있게 촬영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대사를 전날부터 외워오지 않는 것이 좋을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수시로 변하는 촬영환경에 빨리 적응해야 하고 순발력과 신선감을 특히 요구하기 때문에 대사를 완벽히 외워오는 것보다 그 영화와 연기할 인물을 늘 머리에 그리면서 생활하고 촬영현장에 도착한 다음에야 구체화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 경우가 많은 것이 영화 연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감독들은 가끔 영화배우들에게 “촬영현장에 백지처럼 하얗게 나와주세요”라는 주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지금은 신인을 벗어나 사랑받는 스타인 배우 정선경씨와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의 수중촬영을 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 수영실력이 서툴렀던 정선경씨는 올림픽공원 수영장에서 촬영이 있기 전부터 연습을 꽤 했었나 봅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촬영 당일 밤을 새워 힘든 수중촬영을 해야 하는데 초저녁부터 수영연습을 홀로 하며 ‘프로배우’의 의지를 불태우다 정작 진짜 촬영을 한창 진행해야 할 새벽 1, 2시경에는 거의 탈진하여 촬영팀 모두가 크게 당황해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정선경씨의 열심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지만 방법은 바랍직하지 못했던 것같습니다.

사람이 사는 데에는 ‘성실’도 중요하겠지만 그 성실을 빛나게 해주는 ‘지혜’도 중요할 겁니다. 강물이 역류할 때는 아무리 헤엄을 쳐봐야 물살 때문에 어쨌든 뒤로 가게 됩니다. 오히려 헤엄을 치면 힘만 빠지게 될 뿐이겠지요. 반면 앞으로 순류할 때는 그저 강물에 몸만 담고 있어도 물살 때문에 저절로 앞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앞으로 간다고 좋아만 할 일이 아니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역류를 대비해야 겠지요.

눈이 올 때 마당을 쓸지말고 눈이 그친뒤 마당을 쓸라고 합니다. 눈이 오는데 열심히 쓸어봐야 마당도 깨끗해지지 않고 힘만 드는 ‘헛수고’일 뿐이겠지요?

인생 사는데 슬기로운 지혜를 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지혜를 얻게 될 수 있을지, 누구 저에게 ‘지혜를 얻는 지혜’를 가르쳐주실 분 없나요?

joonghoon@seromesof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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