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수교 10년/정치외교]"4자회담 러 제외는 실수"

  • 입력 2000년 9월 28일 19시 01분


“한국과 러시아는 양국간 필요에 의해서 국교를 수립했지만 그동안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서로간에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의 주요 싱크탱크인 세계경제 국제관계연구소(IMEMO) 블라드렌 마르티노프 소장(71)은 10년 전 한국과 러시아의 수교 때 정부를 대신해 전면에 나서서 사전 준비작업을 했던 인물. 당시 IMEMO 부소장이었던 마르티노프 박사는 89년 5월 당시 김영삼(金泳三)통일민주당 총재를 러시아로 초청, 양국의 수교 문제를 깊이 있게 논의했다.

“당시 러시아와 한국에서 국교를 수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확산되고 있었다. 김 전총재를 초청하자 북한이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했지만 한국과의 국교수립 논의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전되고 있었다.”

28, 29일 한국국제교류재단과 러시아외교아카데미 주최로 서울에서 열리는 제2차 한―러 포럼 참석차 방한한 마르티노프 소장은 “남북한 관계 개선을 위한 4자회담에 러시아를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한국의 큰 실수였다”며 “러시아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 외교 관계가 답보상태에 빠졌을 때도 한국의 재벌들이 러시아 개발에 참여하면서 양국간 고리를 이어준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마르티노프 소장은 “한국의 외환위기와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주춤하던 통상관계가 이제는 정상화될 수 있을 만한 분위기가 성숙됐다”며 “앞으로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산하 동방학연구소 유리 바닌 한국몽골부장(70)은 한―러 관계가 예상보다 부진하다는 지적에 대해 “국가간 관계에서 10년은 결코 긴 기간이 아니다”며 “조급해하지 말자”고 말했다.

그는 “한―러 관계 부진의 근본적 원인은 우선 러시아 측에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경제몰락과 정국혼란 등 국내문제로 국제무대에서의 영향력도 급격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리스 옐친 정부가 지나친 친서방 정책으로 항상 미국과 유럽을 외교적 우선관심 대상으로 뒀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어려운 상황이 영원히 계속될 것도 아니고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는 전에 없이 동북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바닌 부장은 전망했다.

바닌 부장은 특히 러시아가 한국의 잠재적인 적이라는 한국의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는 한―러 관계와 러시아의 대외정책을 전혀 모르는 편견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한번도 한반도를 지배하거나 패권을 잡으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으며 다만 한반도가 일본 중국 미국 등 다른 주변 강국의 독점적인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바닌 부장은 “러시아는 주변 4강 중 한반도의 통일을 진심으로 지지하는 유일한 국가이며 미래 통일한국의 가장 ‘사심 없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치영기자·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higgledy@donga.com

▼소련공산당 88년부터 수교 검토▼

구소련은 80년대 중반부터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검토했으나 보수파의 반발로 적지 않은 내부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산하 동방학연구소 유리 바닌 한국몽골부장의 증언과 관련자료를 통해 확인됐다.

한국과의 관계정상화는 러시아 동방학연구소와 국제관계 및 세계경제연구소(IMEMO) 등 국책연구기관이 제기했으며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88년부터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59년부터 남한 연구를 허가받아 독점적으로 한국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던 동방학연구소는 86년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보고서에서 한국과의 직접 접촉을 주장해 보수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공산당 내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한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주장했던 인사들은 당시 동방학연구소와 IMEMO소장을 차례로 거친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 총리와 김 게오르기 동방학연구소 부소장, 바닌 부장 등. 이들은 88년 10월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했다. 공산당에서는 게오르기 샤흐나자로프 국제담당 부서기 등이 동조했다. 88년 김 게오르기 부소장은 한국을 방문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친서를 당시 노태우(盧泰愚)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외무부는 소극적이었는데 바닌 부장은 “북한의 반발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구소련 외무부는 89년 10월 한―소 관계를 경제분야 위주로 제한하고 수교는 최대한 늦춘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때문에 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소 정상회담이 성사되는 과정에서 세바르드나제 장관은 배제되고 아나톨리 도브리닌 미국주재 소련대사가 역할을 대신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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