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대중문화 째려보기]70년대식 터프가이, 원빈님께

  • 입력 2000년 9월 9일 16시 49분


'아줌마' 상란(박지영)과의 불꽃같은 사랑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군요.

KBS 2TV 주말연속극 '꼭지'에서 각광받은 이는 단연 원빈님입니다. 96년 케이블 TV 제일방송 공채 3기로 데뷔했으니까 벌써 햇수로 4년이 흘렀네요. 그 동안 원빈님은 KBS와 MBC를 오가며 '프로포즈', '레디고' 등에 출연하였지만 주목을 받지는 못했죠. 그저 곱상한 외모에 반항적인 눈을 가진 또래 남자연기자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꼭지'가 29.3%의 시청율로 프로그램 인기순위에서 당당 3위로 올라선 9월(8월 28일-9월 3일)에는 원빈님이 아줌마와 사랑을 이룰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원빈님의 억울한 누명이 어떻게 벗겨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드라마의 중심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습니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셋째 아들이란 그저 극의 분위기를 부드럽고 밝게 만드는 양념으로 등장해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엄청난 도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꼭지'에서 원빈님의 활약이 그토록 눈부셨던 이유를 찬찬히 살펴볼까요.

원빈님이 연기한 '명태'는 3형제 중 막내로 공부에는 뜻이 없고 말썽만 피우는 청년입니다. 돌이켜보면, 청춘남녀의 일상을 다루는 청춘시트콤들이 90년대 중반부터 텔레비전의 황금시간대를 점령했지요. MBC의 '남자 셋 여자 셋'으로 시작된 이 열풍은 지금도 약간의 변형을 거쳐 MBC의 '뉴 논스톱'과 SBS의 '행진', KBS의 '좋은 친구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트콤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드라마에 등장하는 청춘남녀는 하나같이 서로가 서로를 골탕먹이고 사소한 일에 상처받고 또 적당한 지점에서 화해하지요.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에, 극단보다는 중용에, 일탈보다는 안주에 더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솟아오른 원빈님의 인기는 '70년대식 터프가이의 부활'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맏형과 동갑인 다방아줌마 상란(박지영)에 대한 불타는 사랑, 자신을 짝사랑하는 지혜(이요원)에 대한 따뜻한 배려, 그리고 호민(장덕수)과의 끈끈한 우정,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용기, 가족에 대한 속 깊은 염려와 그리움까지, 극중 명태의 모습은 여성화되고 소심해진 청춘시트콤 속의 90년대 청년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특히 명태는 사랑하는 아줌마를 위해 인생을 걸지요. 주먹을 휘두르고 술을 마시고 급기야 감옥에 갇힙니다. 제도와 관습의 벽이 아무리 높고 단단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줌마의 행복을 위해 잠시 자신의 열정을 접을 뿐이지요. 무엇인가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던지는 것, 그것을 '운명'이라고 했던가요? 어떤 이는 이념을 위해 자신을 던져 혁명가가 되고 어떤 이는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을 던져 예술가가 되고 어떤 이는 사랑을 위해 자신을 던져 '사랑하는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원빈님은 그 '사랑하는 남자'의 선이 굵고 호방한 70년대식 참사랑을 훌륭하게 품은 것이지요.

'꼭지'의 종영과 함께 원빈님과의 주말데이트도 막을 내릴 것이라는 아쉬움에 젖을 무렵, 기쁨과 걱정이 교차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9월 18일부터 방영될 KBS 월화드라마 '가을동화'의 주인공으로 원빈님이 캐스팅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축하할 일이지만 한 가지 걱정이 앞서는군요. 그것은 '꼭지'에서 가난한 방앗간집 셋째 아들로 열연한 원빈님이 일주일만에 '가을동화'에서 재벌2세로 거듭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시대와 계층을 뛰어넘기에는 일주일이란 기간이 너무나도 짧아 보입니다.

한 드라마에서 인기를 얻은 이미지가 그대로 굳어져 더 이상 연기의 폭을 넓히지 못하는 연기자들이 꽤 있다는 것을 원빈님도 아시죠? 이럴 경우 인기란 독이 든 아름다운 사과입니다. 물론 원빈님은 '가을동화'에서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꼭지'에서 만들어놓은 70년대식 터프가이 이미지를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을 어쩔 수 없이 짊어지게 되었군요.

추석 차례를 마치고 상경한 후에 '가을동화'도 지켜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눈부심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설 계획이신가요? 드디어 원빈님은 훌륭한 연기자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화이팅!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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