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조기숙/경제―정치개혁 “빨리, 강하게”

  • 입력 2000년 8월 24일 18시 39분


모든 대통령은 후대에 길이 남기를 원한다. 역대 훌륭했던 대통령이 단기적인 인기에 연연하기보다는 소신 있게 정책을 밀고 나간 이유도 역사적인 평가를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97년 대선 직후 김대중대통령 당선자를 방문한 미국 민주당 의원들은 외환위기 중에 당선된 김당선자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닮았다고 평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해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미국 역사가들로부터 가장 위대한 3명의 미국 대통령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4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오늘은 김대통령이 절반의 임기를 마치고 집권 후반부를 시작하는 날이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작성한 김대통령의 집권 전반기 성적표(동아일보 24일자 A3면 보도)에 따르면 김대통령은 통일외교와 외환위기 대응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정치 교육 경제 보건복지 등의 개혁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 같은 평가는 경제위기에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했지만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대외정책에서는 미숙함을 보인 루스벨트와는 대조적이다. 이런 차이는 소수정부로 출발한 김대통령과 의회와 행정부에서 압도적인 다수정부를 유지한 루스벨트의 차이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집권 전반기에 대한 평가는 유사한 면이 있어 흥미롭다. 루스벨트는 집권 초기 2년 동안은 ‘확신의 지도자’였다기보다는 실용주의자였다. 정책집행에서는 너무 많은 융통성을 발휘해 일관성이 없고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같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기득권 세력과 끊임없이 타협했지만 원칙은 지켰으며, 수시로 대국민 설득작업을 벌임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잃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원칙 없이 우왕좌왕하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루스벨트가 진보적인 자신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2년 후 민주당이 중간선거에서 압승한 뒤인 집권 후반기였다. 지금은 전쟁에 준하는 위기상황이므로 비상사태시에 부여되는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겠다고 거의 협박에 가까운 취임사를 한 루스벨트도 자신의 개혁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2년이란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려는 김대통령의 바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개최와 남북화해 시대를 연 김대통령의 공적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데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기 전반부에 여론수렴을 소홀히 한 점은 김대통령이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당대에 인정받는 대통령이 되는 데 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김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임기 후반부의 국정운영에 있어서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과제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신속하게 해야 할 일과 신중하게 해야 할 일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경제구조조정과 정치개혁은 때를 놓쳐서는 곤란하지만 의약분업이나 교육개혁은 조급하게 밀어붙이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 통일문제는 후자에 속하는 사안이 될 것이다.

둘째로 개혁 추진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원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공적자금으로 이뤄지는 금융개혁, 지배구조는 손도 못 대는 재벌개혁, 시장원리에 맡긴 교육개혁,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의료보험 통합 등은 김대통령의 노선을 헷갈리게 만든다. 셋째로 야당을 무시하고 밀어붙여서는 어떤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정권의 진의를 의심하도록 만들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개헌 논의는 지양하고 구체적인 정책대안을 놓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김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평가 못지 않게 당대의 국민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 국민은 자신을 믿고 설득하고 동의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를 함께 풀어갈 지도자를 원한다.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내치를 소홀히 해 재선에 실패한 조지 부시 전 미국대통령의 경우는 교훈이 될 것이다.

조기숙(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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