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李총재의 새 '話頭'

  • 입력 2000년 7월 23일 19시 03분


남북관계 국면에서만 본다면 요즘 한나라당은 왠지 무기력해 보인다. 여권의 남북대화 드라이브에 어떻게 대응할지 아이디어도 없고 의견통일도 안돼 있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여권은 상승세다. 29일에는 남북 장관급회담이 열리고 다음달 15일에는 이산가족 상봉이 있다. 행사 하나 하나가 웬만한 이슈쯤은 무관심 속에 파묻어버릴 만큼 파괴력이 크다. 한나라당이 무력감을 느낄 만도 하다.

그렇다고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당장 통일이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정부 여당이 너무 앞서가지 않도록 견제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일은 야당의 몫이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를 놓고 이회창(李會昌)총재에게 조언한 사람 10명중 9명은 “(정부 여당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피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이총재는 그러나 이들 9명 대신 나머지 1명의 조언을 들었다. 어떤 조언인가. “차기 대선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다른 목소리를 내라”는 것이었다. 이총재는 그래서 남북경협의 상호주의, 국군포로문제 등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이총재의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차기 대선에서 족쇄가 될테니 두고 보라”고 했다. 족쇄가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족쇄가 돼도 좋다’는 마음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면 이 또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이총재와 한나라당에 한마디하고 싶다. 상황을 한발짝 떨어져서 조금 큰 시각으로 보라는 것이다.

햇볕정책을 예로 들어 보자. 햇볕정책은 엄밀히 말하면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순간, 냉전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북한이 어떻든 외투를 벗었으니까.

햇볕정책의 시대적 적실성(適實性)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부 여당의 말대로 남북간에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열렸다면 정책으로서 햇볕정책은 그 수명을 다한 것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면 햇볕정책 이후의 정책(post sunshine policy)은? 성급하다고 할지 모르나 이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것은 정부 여당의 일이면서 또한 이총재의 일이기도 하다. 남북관계뿐이겠는가. 격변기에 국가적 어젠더를 세우는 일은 우리의 창의력을 끝없이 자극한다. 미 일 중 러 4강외교만 해도 그렇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앞으로 개선된 남북관계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4강외교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4강을 잘 다독거려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총재는 한 발 나아가 4강과 남북을 하나의 틀 속에 엮어넣는 외교를 펼칠 수도 있다. 4강과 남북의 주요 정당들이 함께 참여하는 ‘동북아 경제공동체’ 창설 준비모임 같은 것은 그 중 하나일 수 있다.

문화적 도덕적 영역으로 넘어가면 할 얘기는 더 많아진다.

미국의 원로 국제정치학자 스탠리 호프먼은 프랑스 대통령 고 드골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면서 드골이 제창했던 ‘위대한 프랑스’는 “구체적인 정책이 아니라 의지와 정신의 목표였으며…, 정치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이고 도덕적인 야망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총재와 한나라당이 제시할 우리의 ‘의지와 정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올 여름 휴가 중에 이총재나 당직자들 모두가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화두가 아닌가.

<이재호기자>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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