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담론/김형찬]언어 헤게모니 쟁탈전

  • 입력 2000년 7월 17일 18시 39분


옛 로마인들은 언어를 소유한 인간이 언어로 지시된 존재를 소유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교황들은 로마시의 비밀 이름을 몰래 보관했다고 한다. 적의 저주로부터 도시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허황된 생각만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E 방브니스트가 지적하듯이, 언어는 세계를 재현하지만 그 재현은 세계를 언어의 독특한 구조에 종속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각 민족은 자신의 언어를 통해 독창적 세계를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먼저 따라야 할 의무와 금기와 관습들을 언어습득 과정을 통해 익히며 그밖의 문화를 배워 나가는 것이다.

◆"영어도 우리말" 주장까지◆

그렇다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처럼 인간이 ‘언어적 존재(locuteur)’인 한, 인간 사회에서 권력이나 문화의 갈등과 투쟁이 언어를 통한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피할 길이 없는 일인 듯하다. 얼마 전 인간게놈프로젝트의 결과 발표를 앞두고 세상이 떠들썩할 때 있었던 한 신문의 ‘지놈 선언’도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그것은 ‘일부(?)’ 언론에서 ‘게놈’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전세계인들이 가장 널리 사용하는 용어는 ‘지놈’이므로 표기를 ‘게놈’에서 ‘지놈’으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놈’이라는 영어식 발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전세계에 가장 많다는 것도 무리가 있는 주장이었지만, 이미 한국사회에서 십여 년에 걸쳐 ‘게놈’으로 자리잡은 사회적 약속을 그렇게 쉽게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한 발상이 순진했다.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세계어를 지향하는 ‘미국어’의 권력을 등에 업고 한국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에 관한 사회적 논의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던 권력의지는 결국 ‘게놈’이 이미 한국사회에서 오랜 기간 구축한 권력과의 승산 없는 투쟁에 힘겨워하고 있다.

또 우리 사회 한편에서는 세계화 시대, 인터넷 시대에는 “영어도 이젠 우리말”이라며 영어에 대해 “주인의식을 갖자”는 주장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언어의 문화적 권력적 속성을 잘 아는 인터넷에서는 이미 다국어번역시스템이 언어 장벽 해소의 대안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어차피 모든 사람에게 능숙한 영어가 필요한 것이 아닌 이상 무모한 전국민의 영어교육에 소비할 시간과 돈 그리고 권력투쟁의 에너지 중 극히 일부만 다국어 번역 및 통역 프로그램 개발에 투자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도의 외국어는 쉽게 해결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능숙한 영어가 꼭 필요한 소수의 사람들은 별개의 문제다. 과학기술은 ‘똑똑한’ 인간이 과학기술을 능력껏 알아서 잘 활용하라고 요구하기보다는 일반인들이 과학기술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맞추어 가며 현명하게 발전해 왔다.

◆언어는 '하나의제도'◆

영어의 우리말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머지 않아 중국의 영향력이 미국보다 더 커질 때 다시 ‘중국어도 우리말’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조선후기에 중국어를 사용하자고 주장했던 당시의 세계화론자 박제가의 주장도, 중국의 권력자 원세개에게 개화를 위해 어려운 중국어 대신 조선어를 사용하라고 권했던 조선말의 유학자 이승희의 제안도 결국은 웃음거리로 남고 말았다. 소쉬르의 말처럼 언어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제도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문화와 권력의 문제로 귀결되고 마는 언어의 문제란 그렇게 실용성이나 합리성만 가지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콜레쥬 드 프랑스의 취임 강연에서 롤랑 바르트가 역설했던 “언어에는 권력이 스며 있다”는 평범한 주장은 오늘날에도 진부하지 않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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