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이회창총재의 딜레마

  • 입력 2000년 6월 26일 19시 34분


지난 봄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는 행복했다. 4·13총선 승리가 비록 영남권의 반(反)DJ 정서에 따른 싹쓸이 지지에 힘입은 바 크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엄연한 민의의 표출일진대 지레 겸연쩍을 이유는 없었다.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양당 구도라. DJP공조가 걸리기는 하지만 이대로 간다면 차기 대권을 잡는데 별 문제가 있겠는가. 그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상생(相生)의 정치’를 외칠 수 있었다. 총선 공천 과정에서 거물급 비주류인사들을 정리한 터에 총선에서 승리했으니 당권 장악은 손바닥 뒤집기나 마찬가지. 예상대로 5월31일 전당대회에서 그는 66.3%란 압도적 지지로 총재직에 재선출됐다. 이제 당내에 감히 ‘이심(李心)’을 거스를 분위기나 세력은 존재하기 쉽지 않다. 양정규(梁正圭)부총재, 김기배(金杞培)사무총장, 정창화(鄭昌和 )원내총무 등 신주류로 부상한 구(舊)민정계 출신들과 이세기(李世基)남북관계특위위원장, 정형근(鄭亨根·제1정조위원장)의원 등이 이총재 측근에 포진했다.

▼한 측근의 ‘단언’▼

우려했던 대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이한동(李漢東)자민련총재를 총리자리에 앉히면서 DJP공조가 사실상 복원됐다고는 하나 이는 예상했던 일인데다 DJ로서도 그 이상 야당의원 빼가기를 시도하지는 못할 거라는 점에서 결정적 타격은 아니다. 일면 정치 도의적 명분을 상실한 DJP공조를 비판하면서 일면 상생의 정치로 DJ를 압박해 나간다면 불리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큰 정치를 앞세워 ‘차기 대권 수임자’의 면모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던 이총재에게 ‘남북정상회담 성공’이란 복병이 나타났다. 대의상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박수만 치다가는 정국의 주도권을 고스란히 DJ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결국 ‘총론 찬성 각론 반대’의 딜레마를 피하기 어렵게 됐다. 더욱이 탁자 위의 유리잔 같은 남북관계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삐끗하면 지금의 ‘감상적 진보’는 하루아침에 ‘종래의 보수’로 돌변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개연성에 비춰볼 때 이총재의 딜레마는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러나 이총재의 딜레마가 행여 한 측근이 단언했다는 “남북정상회담은 결국 실패할 것”에 근거하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다.

물론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물은 이제부터 만들어 나가야 하고 거기에는 야당의 견제와 비판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성공을 전제로 한 비판과 실패를 전제로 한 비판은 그 접근방식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이총재는 과거 냉전시대 인사들에 둘러싸인 채 ‘보수 행보’를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결코 그러리라고는 믿지 않지만 ‘실패를 전제로 한 비판’이란 오해의 소지는 없을지 성찰해야 한다. 이제 한국 정치는 그 외연이 한반도 전체로 넓혀졌다. 남쪽만의 ‘좁아 터진 정치’로는 안된다. 더 이상 지역과 정파에 매달린 채 권력잡기에만 급급해서는 설령 권력을 잡는다한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열어 나가기는 어렵다. 이총재는 소극적 수세적 보수 행보에서 벗어나 DJ가 놓은 ‘통일의 다리’를 스스로 이어나가 완성시키겠다는 적극적 전향적 자세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큰 정치고 ‘대권후보 이회창’이 해야 할 일이다.

▼‘南南대화’의 속내는▼

딜레마에 빠져 있기는 DJ도 마찬가지다. 그는 새로운 남북시대를 열어 나가야 하는 시점에 가장 보수적인 정파와 손잡기 위해 애를 먹고 있다. 원내 안정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총리자리도 주고 온갖 몽니도 받아줘야 한다. 여권의 생각은 야당의 ‘실패를 전제로 한 비판’에 끌려 다니다가는 DJ의 남은 임기 안에 그 어떤 남북정상회담의 가시적 성과도 이뤄낼 수 없으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어렵다. 남남(南南)대화의 속내가 이럴진대 남북대화가 잘 풀려 나갈지 걱정이다.

이총재는 스스로 딜레마의 족쇄를 풀어야 한다. 이총재가 족쇄를 풀면 DJ가 딜레마에서 벗어나는데도 적잖은 힘이 될 것이다. 현실 정치를 모르는 얘기라고 웃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그런 큰 정치, 큰 정치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시대적 민족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 때 이총재는 ‘큰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눈앞의 권력보다는 역사와 미래를 봐야 한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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