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윤구병/호박잎에게 배운 자식사랑

  • 입력 2000년 6월 18일 19시 35분


제가 사는 변산 지역은 산과 들과 바다가 다 갖춰져 있어 부지런히 몸만 놀리면 굶어죽을 걱정이 없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관군에 쫓기던 동학군이 일부는 살아남으려고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변산으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절이 좋아져서 지리산에 갔던 사람과 변산에 갔던 사람이 돌아오는 걸 보니, 지리산 갔던 사람은 피골이 상접한 모습인데 변산에 갔던 사람은 살이 포실하게 쪘더래요. 저 어렸을 적 흉년이 들었을 때 우리 마을 분들은 왕겨와 수수껍질을 갈아 먹으면서 견뎠는데 이곳 분들은 개펄에서 낙지를 파먹고 흉년을 났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난 곳인데도 마을에 젊은이들이 드뭅니다. 땅을 지키고 살리려는 뜻을 지니고 남아 있거나 새로 들어온 젊은이들도 아이들 교육 문제와 부족한 일손 때문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여기에 산 지 여섯해째 접어들면서 아직 일머리도 트이지 않고 일손도 서툴러 교육문제는 먼 뒷날 일이라고 느긋하게 마음먹고 있었던 게 오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식구들을 구슬리고 달래서 농사일과 중등과정의 지역 아이들 교육을 함께 해가느라 경황이 없는 터에 이번에는 짐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그래도 일손이 많으니 서너살 안팎의 꼬마들을 돌봐달라는 부탁이 들어온 것입니다. 사정이 딱해서 ‘내 코도 석자다’라며 버틸 수도 없었습니다. 본디 우리 공동체가 ‘교육은 무상으로’라는 원칙을 코끝에 내걸고 있는 터라 품앗이가 아니면 거저 돕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손 하나가 더 줄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랍니까. 열명밖에 안 되는 아이들이지만 워낙 어려서 제대로 돌보려면 줄잡아 두 사람이 매달려야 하는 놀이방에서, 자격증도 있고 경험도 많은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아이들을 더 돌볼 수 없다고 손을 떼니, 아이들 부모들이 쫓아와서 귀농할 뜻도 있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유치원 정교사 한 분을 빨리 알아봐 달랍니다. 이번에는 가난한 농어민이지만 그냥 돌봐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겠으니 박봉이나마 받고 일할 분을 구해달라는 거지요. 참 어려운 부탁입니다. 특별한 경우라고 유급교사를 뽑자니 무상교육의 원칙에 맞지 않고, 자원봉사자를 찾자니 쉽지 않고…. 할 수 없이 공동육아운동에 앞장선 후배 교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하회만 기다리는 중이지요.

제가 구인광고 비슷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는 뜻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옥수수밭을 매면서 옥수숫대 사이에 끼여 저절로 자라는 호박순을 보았습니다. 그냥 뽑아 던지기에는 너무 아까워 지난 겨울에 미리 땅을 파서 똥오줌까지 부어놓았던 호박 구덩이에 옮겨 심었습니다. 뿌리를 다치지 않게 하느라 제법 땅을 넓게 파서 흙째로 옮겼는데도 하루 햇볕에 그 싱싱하던 잎들이 축 늘어져 버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역시 안되는구나’하고요.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가보니 시들어 늘어진 넓은 잎 사이로 조그마한 새 잎이 손을 내미는 게 보이지 않겠어요? 참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물도 부족하고 뿌리도 힘을 잃어 제대로 물을 빨아들일 형편이 안되는데, 물이 많이 필요한 어미잎들이 저 살겠다고 나서면 새끼들까지 죽이게 된다, 우리 어미잎들이 희생해서 새끼잎들을 살리자고 밤새 의논을 했던 것 같아요. 아, 식물 사이에서조차도 자식 사랑, 새 생명에 대한 배려는 이렇듯이 절절한 데가 있구나 싶어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걸 보면서 ‘왜 우리한테만 이런 무거운 짐을 지우려 드는 거야. 아직은 자신을 돌보기에도 급급한데…’라며 속으로 투정하던 마음이 부끄러워졌습니다. 호박잎만큼도 안되는 소갈머리에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지금 이 산골에는 부지깽이 힘이라도 빌릴 수 있으면 빌리고 싶을 만큼 바쁜 때입니다. 새벽 다섯시가 되기 전부터 눈 비비고 일어나 하루 종일 서둘러도 해낸 일보다 할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돌봐야 합니다. 이 아이들이 바로 우리들의 미래의 삶이니까요. 희망은 바로 우리 미래의 삶을 일컫는 말입니다.

윤구병(변산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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