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손봉숙/탈선 지도층 영원히 추방을

  • 입력 2000년 5월 28일 19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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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스스로 “국민이 개혁피로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지금 우리 사회는 불신과 불만으로 병들고 있다. 국민의 피로감에 대한 대통령의 진단은 옳은 듯하나 그 처방은 잘못되었다.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선거결과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약속한 야당과의 ‘상생정치’ 대신 이한동씨를 총리로 영입하고 자민련과의 공조를 복원하는 길을 택했다. 다시 말해 대통령은 ‘민의’ 대신 ‘수’의 편익을 취했고, 총리는 ‘약속’을 버리고 ‘자리’를 탐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국민은 지난 2년여간 지지부진했던 개혁에 실망한데 더하여 이 나라 최고 지도자인 두 공인의 정치적 ‘악수(惡手)’로 더욱 큰 피로감과 상처를 입게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뭔가. 피로와 배신감에 찌들어 있는 국민에게 약은 못 줄망정 오히려 더 깊은 병을 안겨 주다니. ‘광주술판’ 문제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4·13 총선은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을 수 있다는 국민의 기대감을 채우지 못한 채 역대 어느 선거 못지 않게 금권이 난무하고 흑색비방과 지역 연고주의가 기승을 부린 정치판 행사로 끝났다.

이런 불만 속에서도 상당수 국민은 소위 ‘386세대’라는 신진정치그룹의 등장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박수를 보냈다. 텔레비전을 통해 민주투사들의 영령 앞에 머리 숙인 이들을 보면서 “그래 너희들이라도 한번 잘해봐라”면서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야제 행사 후의 술자리는 아무래도 그 때 그 날의 분위기와 맞지 않을 뿐더러 국민정서와도 어긋나는 개탄스러운 공인들의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숱한 금배지들이 그래온 것처럼 그들마저 누군가가 접대하는 고급술집에서 국회의원으로서의 자리와 힘을 즐겼다. 그 대열에 이 나라의 교육총수와 학계 인사들까지 끼여 있었다니…. 이들이 광주에서 벌인 낮과 밤의 ‘이중성’이 국민의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와중에 총선시민연대 대변인으로 선거기간 내내 신선한 청량제 역할을 한 시민운동의 스타 전녹색연합 사무총장 장원씨의 탈선은 우리 모두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아니 너마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우리사회를 지탱할 마지막 도덕률마저 수직으로 곤두박질하는 판국이라고나 할까. 자칭타칭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동반 추락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날개가 없어 보인다. 이 추락이 과연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 끝이 안보인다. 우리 모두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차라리 갈데까지 가버리는 것이 나을까? 곪아 터져야 새살이 돋을까? 이 말로 위안을 삼기엔 우리 사회의 병이 너무 깊고 국민의 고통이 너무 크다. 그렇다고 손놓고 앉아 가슴앓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도 어찌보면 우리 사회가 열린 민주주의를 향해 나가고 있는 조짐이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가 심기일전해 만신창이가 된 사회를 치유하고 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계기로 삼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지도자들은 공인으로서 절제하고 공사를 구분하며 솔선수범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들, 약자에게는 군림하고 강자에게는 빌붙는 사람들, 자신에게 득이 안되는 약속은 언제나 깨버리는 사람들, 자신이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중 잣대를 가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더 이상 공인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잘못된 지도자는 면밀히 검증해 공인의 자리에서 영원히 탈락시켜 나가야 한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언행이 일치하는 공인을 배출할 수 있는 정치문화를 배양시켜 가는 것이야말로 국민이 직접 챙겨야 할 가장 중요한 권리요 의무다.

손봉숙<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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