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정치인들의 '죄수 딜레마'

  • 입력 2000년 5월 16일 19시 11분


누구나 선거에 출마하면 당선을 원한다. 돈을 조금만 쓰고 당선되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낙선하는 경우 한푼이라도 덜 쓰고 떨어지는 게 불행 중 다행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기든 지든 돈을 적게 쓸수록 좋다는 말이다.

그런데 실제 상황은 정반대다. 선관위와 검찰, 시민단체와 상대 후보가 눈에 불을 켜고 보는데도 붙은 후보든 떨어진 후보든 자기 능력으로 끌어댈 수 있는 돈은 다 끌어다 쓴다. 그래 놓고는 당선자는 브로커의 폭로 협박에 또 돈을 뜯기거나 선거법에 걸려 그토록 힘들여 손에 넣은 금배지를 박탈당하고 낙선자는 낙선자대로 헛되이 뿌린 돈이 아까워 밤잠을 설친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상황 때문이다. 냉전시대 학자들은 이 딜레마를 설명하기 위해 옛 소련을 예로 들곤 했다. 죄없는 시민 둘이 KGB에 잡혀갔다. KGB 요원은 두 사람을 따로 가둔 다음 각자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둘 다 자백하면 둘 모두 징역 10년, 너만 자백하면 너는 정상을 참작해서 징역 1년, 네 친구는 무기징역을 받는다.” 물론 냉전시대인 만큼 학자들은 소련이 누구도 자백하지 않으면 둘 모두를 징역 3년에 처하는 사회라고 단서를 붙였다.

이 ‘게임’에 임하는 최상의 전략은 자백이다. 우선 친구가 자백하지 않는 경우. 나도 자백하지 않으면 징역 3년, 자백하면 징역 1년이다. 그러니 자백하는 게 유리하다. 다음은 친구가 자백하는 경우. 자백을 거부하면 무기징역이요 자백하면 징역 10년이다. 역시 자백하는 쪽이 낫다. 친구가 어떻게 하든 관계없이 자백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둘 모두 자백해서 둘 다 징역 10년을 받았다. 둘 모두 서로를 믿고 끝까지 버텼으면 징역 3년으로 끝났을 텐데.

공직선거 출마자들이 법정 선거비용보다 훨씬 많은 돈을 쓰는 것은 그렇게 하는 쪽이 절대적으로 우월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경쟁 후보가 돈을 쓰는 경우 내가 돈을 쓰지 않으면 당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드니까 나도 써야 한다. 경쟁후보가 돈을 쓰지 않을 경우 혼자 쓰면 효과가 더 크니까 역시 써야 한다. 상대방이야 어찌하든 나는 능력이 닿는 만큼 돈을 써야 당선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혼자만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유력한 경쟁후보들이 똑같이 많은 돈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돈을 쓰지 않고 공정한 게임을 하는 경우와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후보자들이 공정선거를 하기로 공개적인 결의를 하면 되지 않을까? 아쉽지만 그런 결의는 효과가 없다. 누군가 그 결의를 배신함으로써 혼자 이익을 볼 수 있고, 또 그걸 누구나 알기 때문에 결국은 모두가 그 결의를 배신하는 전략을 택하게 되는 탓이다.

16대 국회의원 총선 출마자들의 선거비용 신고명세를 보면 1000여명의 후보 가운데 법정 선거비용보다 돈을 많이 쓴 후보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 일종의 가면극이요 거짓말 대회라는 걸 모르는 사람 역시 없다. 선거법을 제대로 지킨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후보자는 국세청도 쉽게 밝힐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회계장부를 정리해 두었을 것이다.

정치인들의 부도덕을 성토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은 특별히 높은 도덕성을 지닌 성인군자가 아니다. 기세를 과시하는 화려한 선거운동을 하고 남몰래 점심이라도 한끼 걸게 산 후보에게 눈길을 주는 유권자들과 똑같은 이기적인 인간들이다. 그러니 해법은 돈 선거가 적발당할 확률을 높이고 적발당할 경우 받을 불이익을 대폭 강화하는 쪽으로 규제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선거비용의 세부명세 공개를 제한하는 선거법 조항을 고치고 정당활동비라는 명목 아래 쓰는 돈을 선거비용에 포함시키자는 중앙선관위의 견해는 전적으로 타당하다. 선거비용을 별도 계좌에서만 지출하도록 하고 금융거래자료 추적의 범위를 넓히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정치인들은 주례 금지와 기부행위 제한이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규제 역시 돈선거로 인한 패가망신을 예방해 주기 때문에 자기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유시민(시사평론가)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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