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담론]김형찬/公人의 사적인 얼굴

  • 입력 2000년 5월 8일 19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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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게 말하자면 지금 나의 가정, 가족 관계도 그러한 숭고한 과정을 거쳐 이뤄낸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신만을 사랑한다.”

백두사업 로비설의 주인공 린다 김이 받은 몇 번째 남자의 연서(戀書)인지는 몰라도 편지의 필자가 세상과 맺고 살아 온 ‘관계’를 뒤흔들어 놓은 사랑의 고뇌를 바라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중년 엘리트의 애틋한 감정▼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한국사회에서 완벽한 남성으로 가장한 채 살아야만 했을 그에게, 그 모든 가식을 벗어버릴 수 있게 하는 사랑의 유혹을 이겨냈어야 했다는 비난은 너무 가혹한 것일 수 있다. 상대의 마음이야 어떠했든 그것은 어쩌면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생을 걸 만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가슴 뭉클한 말인가.

“당신만을 사랑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종교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고 말했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 만남은 하나 둘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지만…▼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은 타인과의 숱한 만남을 통해 온갖 관계를 맺으며 천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 전직 국회의원이라는 이 중년 남자는 사회에서는 국민주권의 대변자였고 아내에게는 반평생을 함께 한 든든한 남편이요 자식들에게는 자랑스런 아버지였으며 부모님께는 믿음직스런 아들이었고 동창회에서는 능력있는 친구였으며 거리에서는 품위있는 신사였을 것이다.

이 모든 역할은 하나의 몸을 매개로 하여 균형잡힌 긴장을 유지하며 하나의 사회적 인간으로 드러난다. 하나의 역할에서 삐걱거림은 곧 모든 역할로 전달된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지적하듯이 역할들간의 상호작용이 원만한 흐름을 유지하지 못할 때 그것은 모든 역할의 중심에 있는 ‘몸’을 통해 드러난다. 말을 더듬는다거나 얼굴을 붉히거나 어색한 몸짓을 하는 등의 당혹감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래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모순투성이인 인간에게 한두 개의 역할에 문제가 생겼다고 반드시 자아 전체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누구나 예상밖의 얼굴 한두 개쯤은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법이다.

이 비밀스런 얼굴에 문제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얼굴에 아무런 문제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사회가 가르쳐 준 매우 유용한 기술 덕분이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노베르트엘리어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문명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행위가 지위를 결정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감정과 행동의 통제기술을 익힌다.

▼부적절한 결과에 대한 우려▼

그는 가정도 버리지 않았고 직장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제의 기술로 포장된 이런 표면적 안정에도 불구하고 모순된 역할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적지않은 부조리를 만들어냈으리란 점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엄청난 특권와 책임을 가진 ‘공인’의 내적 부조리는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구조적 부패의 고리와 쉽게 연계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철없기까지 한 이 중년남자의 애틋한 사랑고백을 보며, 이 탁한 세상에서 정말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

하지만 공인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초래될지 모를 ‘부적절한 결과’가 너무도 크기에 이 사회가 그에게 묻는 책임은 당연히 혹독하다. ‘공인’의 얼굴로 로비스트 린다를 만날 특권을 가졌을 때 그의 ‘사적인 얼굴’은 이미 저당잡힌 것이기 때문이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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