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음란성 '잣대'마련 머리 맞댄 法

  • 입력 2000년 4월 25일 19시 49분


사이버 공간에 포르노물 등 노골적인 음란물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예술을 표방하는 문학 작가의 ‘소설’을 음란물로 처벌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소설가 장정일(37)씨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음란성 여부를 심리중인 대법원의 비교법실무연구위원회(회장 이용훈·李容勳대법관)는 24일 법학자와 재판연구관 등 40여명이 모인 가운데 ‘문서와 도화의 음란성 판단기준’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날 세미나는 97년 1심과 98년 항소심 재판에 이어 장씨의 소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세 번째 ‘법정 토론’인 셈. 이날 세미나는 이 문제를 둘러싼 외국의 입법례와 판례의 추세가 주요 토론 대상이었다.

이대법관은 토론에 앞서 “외국의 판례를 연구해 얼마든지 자유롭게 우리 나름대로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 수 있다”며 열린 마음으로 이 문제에 접근할 것을 요청했다.

이어 경희대 법대 임지봉 교수는 ‘미국 판례상 음란물의 판단 기준’이라는 발표를 통해 “미국에서는 주제가 있는 음란물의 경우 사상의 표현으로 취급되며 따라서 수정헌법 1조에 의해 보호된다”고 밝혔다.

임교수는 “미국 대법원도 음란성을 가장 다루기 어려운 이슈라고 고백하고 있다”며 “음란성 기준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점잖은 사회를 유지할 때의 이익과 표현의 자유라는 이익 사이의 ‘이익 형량(衡量)’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국민대 이재승교수는 “독일 법원은 예술이냐 음란물이냐를 ‘분류’가 아닌 ‘정도’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며 “정도가 심해도 예술성이 인정되면 예술특권을 향유할 수 있고 예술성이 미달되면 정도가 약해도 가벌성이 인정될 수 있다”고 밝혔다.

민중기(閔中基)부장판사는 “미국에서는 음란물 규제에 대한 관심이 문학작품이 아닌 사이버 공간의 음란물로 옮겨가고 있고 유럽에서는 성인 대상의 음란물은 처벌 기준을 완화하는 대신 미성년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입법과 판례가 형성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장씨의 소설에 대해서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명백한 범죄”라는 강경론과 “사이버 공간에 하드코어 음란물이 범람하는 판에 문학작품의 음란성을 문제삼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상황 변화론이 참석자들 사이에서 팽팽히 맞섰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또 “장씨 소설의 탄생배경이 ‘몸’과 ‘성’을 주요 소재로 하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며 이 같은 경향을 보여주는 미국의 1급 작가 신디 셔먼의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소개하고 음란과 예술은 독자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비교법실무연구회는 2개월에 한번씩 이처럼 대법원에 계류중인 사건 가운데 ‘외국의 학설과 판례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사건’이 생기면 세미나를 열고 토론을 진행해 왔다.

어디까지나 세미나일 뿐이고 결론을 내는 재판은 아니어서 장씨 사건에 대한 판단은 어디까지나 재판부의 ‘가치’에 달려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의 특수성도 중요한 판단 근거”라고 말했다. 한 재판관은 “판례에 따르면 명백한 유죄이나 시대의 조류가 개방화로 가고 있는 만큼 성인용으로 밀봉해 판매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절충적 방안을 제시하기도.

장씨는 97년 음란문서 제조 등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0월의 실형을 받고 법정 구속됐다가 98년 항소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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