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높아진 시민의식…획일적 제재 안통한다

  • 입력 2000년 4월 20일 19시 59분


▲행정심판 청구 봇물

군 복무중 만성 신부전증이 악화된 김모씨(24)는 지난해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등록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올해 초 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김씨의 유공자 등록신청에 대해 보훈처측은 “질병과 공무 수행과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행정심판위원회는 “입대 당시 정상 근무가 가능할 정도로 증세가 경미하던 김씨의 질병이 입대 이후 급속히 악화된 점으로 미뤄 군생활이 질병을 악화시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또 면허를 경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운전면허를 취소당한 이모씨(33)도 지난해 10월 서울경찰청장을 상대로 행정심판을 내 면허취소가 부당하다는 결정을 받아냈다.

김씨나 이씨처럼 잘못된 행정처분을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행정심판을 청구하는 사례가 최근 급속히 늘고 있다.

▲청구한 사람 이긴비율 높아…행정심판 제기 실태

행정심판은 △행정기관이 면허 허가 인가 등을 부당하게 취소하거나 영업정지처분 등을 내렸을 때 △행정기관에 면허 허가 인가 등을 신청했으나 부당하게 거부당했을 때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제도. 행정심판을 청구한 후 통상 60일 이내에, 늦어도 90일 안에 심판 결과를 알 수 있다.

중앙부처와 지방경찰청 지방국토관리청 등 특별 지방행정기관, 광역자치단체의 행정처분에 대한 행정심판은 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에, 기초자치단체의 행정처분에 불만이 있으면 해당 광역자치단체 행정심판위원회에 심판을 청구토록 돼 있다(법제처 홈페이지 www.moleg.go.kr 참고).

지난해 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에 접수된 행정심판 청구건수는 8055건. 98년(7336건)보다 719건(9.8%) 증가했다.

또 각 광역자치단체 행정심판위원회에 낸 행정심판 건수도 △부산 278건(98년)→370건(99년) △인천 81건→145건 △경기 351건→410건 △경북 116건→241건 △경남 238건→413건 등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전남 경북 등 9개 광역자치단체의 경우 청구한 사람이 이긴 비율(인용률)도 높아지는 추세다.

▲"폭력-집단시위보다 바람직"…주요 청구사례

행정심판 청구 내용은 주택 건설 운전면허 식품위생 분야 등 다양하다.

서울 관악구 신림10동 신림 2-1구역 주택재개발사업 주민들은 지난해 말 “아파트 건축공사가 진행되는 도중 가(假)청산금을 부과한 것은 무효”라며 대한주택공사를 상대로 행정심판을 내 이겼다. 재개발사업 시행자인 주택공사가 중도금 명목으로 가구당 500만∼2600만원의 가청산금 납부를 요구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는 올해 초 부산시 도시개발공사에 대해 임대용으로 지은 아파트의 건설원가와 임대료 산출내용을 공개하라고 요구했으나 공사측이 영업상 비밀에 해당된다며 거부하자 행정심판을 냈다. 행정심판위원회는 “아파트 건설원가와 임대료 산출 내용은 영업상 비밀에 해당된다고 보기 어려우며 이를 공개한다고 해서 공사측의 이익을 해친다고 볼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또 경기 성남시 분당구 주민들은 경부고속도로 판교톨게이트 통행료 징수가 부당하다며 지난해 4월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행정심판을 제기했으나 해당 위원회가 이를 기각하자 법원에 행정소송을 내기도 했다.

제주도 법무담당관실 고상도(高相道)계장은 “주민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행정심판 청구건수가 늘고 있다”며 “폭력이나 집단시위 등이 아니라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쳐 행정처분에 반발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행정력 낭비 제도개선 시급

청소년보호법 등 일부 법률의 경우 몇몇 조항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데다 공무원들이 실적 위주의 무리한 단속을 하는 바람에 비슷한 내용의 행정심판을 제기해 청구인이 이기는 사례가 되풀이되고 있다. 법률개정 등 제도개선이 늦어져 행정력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5월 경기 수원시에서 갈비집을 경영하는 A씨는 교수와 회식을 온 미성년 대학생 2명에게 술을 팔았다는 이유로 영업정지 2개월의 처분을 받자 행정심판을 냈다. 경기도 행정심판위원회는 “법적으로 미성년자이지만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대학생인데다 교수와 함께 대학의 독특한 문화행사를 하던 중 술을 마신 것에 대해 행정처분을 내린 것은 부당하다”고 결정했다.

부산 북구 구포3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김모씨(45)도 올 1월 성년에서 30일 모자란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다 영업정지 2개월의 처분을 받자 행정심판을 제기했다. 부산시 행정심판위원회는 “행정처분으로 얻게 되는 공익보다 청구인이 볼 재산적 피해가 더 크다”며 김씨의 편을 들어줬다.

경남도 김경효(金耕孝)법무담당관은 “단속 공무원들이 사안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획일적으로 단속을 벌이는 바람에 행정심판이 잇따라 제기돼 행정력을 낭비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법규를 정비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진영기자·제주·대전·부산〓임재영·이기진·조용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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