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어 퓨어 굿맨'

  • 입력 2000년 4월 19일 19시 14분


A Few Good Men(1992). 감독 Rob Reiner.

출연: Tom Cruise, Jack Nicholson, Demi Moore

전쟁의 시대에 소년은 군인을 동경한다. 빛나는 총칼과 제복의 매력, 그리고 사악한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구한다는 애국심이 빚어낸 아름다운 꿈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달라진다. 학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지적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군인을 꿈꾸지 않는다. 심지어는 군대 근처에 몸을 담기조차 싫어한다. 어린 시절 품었던 아름다운 꿈이 성인의 현실에서 빛을 잃는 것은 세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육·해·공군 삼군을 통틀어 해병대만큼 자부심이 강한 군대도 드물다. 진짜 사나이 해병의 신화와 권위의 일부는 적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군대, 죽음과 가장 가까이 서 있는 부대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어 퓨어 굿 맨>(소수정예부대)은 전쟁의 신화가 더 이상 최고의 흥행거리가 아닌 시대에도 호소력을 지닌 영화이다. 이 영화가 우리 나라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비디오 시장에서도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젊은 미남 배우(톰 크루즈)나 현실감 나지 않는 미모의 여자장교 (드미 무어), 또는 악역의 명인 잭 니콜슨 등 호화 배역이 불꽃 튀게 벌이는 연기의 경연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과 군대라는 특수한 체험이 한국인의 의식 속에 차지하는 보편성 때문도 아닐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 대한 특수한 정서가 있다. 그러기에 국회의원의 자격요건으로 자신은 물론 아들이 군대에 다녀왔느냐 여부가 더없이 중대한 시비 거리가 되고, 하급 공무원 임용 시험에서 현역 복무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여성을 차별하는 제도라고 선언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해 온 나라 제대군인이 난동을 부린 것이다.

이 작품이 군대영화 이기 때문에 미국인과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이유는 전쟁의 시대에서 평화와 법의 시대로 이행해 가는 21세기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메시지는 폐쇄된 한계상황에서의 인간의 오만과 독선, 그리고 그로 인한 파멸의 위험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어 퓨 굿 맨>의 외형적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한 해병 사병의 죽음에 대한 책임의 소재를 두고 벌어진 진실 규명의 과정이다. 해군본부의 법무관 갤로웨이 중령은 쿠바의 관탈라모 베이에 주둔한 해병부대에서 올라온 사병의 사망보고서를 검토하다 사인에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한다.

산티아고 이병을 린치 끝에 죽음으로 몰고 간 두 사병의 죄를 판정하기 위해 군사재판을 열린다. 법무감의 결정에 의해 변호인 팀이 구성된다. 팀장으로는 하버드 출신의 중위(톰 크루즈)가, 그리고 그 보조수로 갤로웨이 중령(드미 무어)과 다른 중위 한 사람이 배속된다. 계급이 직책의 중요도를 결정하는 것이 상식임에도 중위 팀장에 중령이 팀원이 되는 기이한 구성은 재판에서의 업무의 전문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숨은 의도는 실제로 법정에 한 번도 서 본 일이 없고 오로지 죄질협상 (plea bargaining)으로 사건을 해결해 온 협상전문가를 변론 팀 책임자로 선정함으로써 사건의 파장을 축소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정식재판을 통해 행여 군 내부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노출될 것을 두려워한 의도적인 배려임이 짐작할 수 있다. 군 검찰도 오로지 죄질협상으로 사건을 종결하려 한다. 미국의 법 아래서는 피고인과 검찰간에 죄질협상이 널리 이용된다. 피고인이 혐의를 받고 있는 죄보다 가벼운 죄의 자백을 하는 대신 무거운 죄는 불문에 부치는 협상 이 이루어지면 검사도 판사도 협상 내용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법의 위반이다. 속말로 검찰과 도둑 사이에 신사협정 이 이루어지면 판사는 배심재판을 거치지 아니하고 곧바로 자백한 죄에 대해서만 형을 선고하는 것이다.

죄상은 있는 그대로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한다는 실체적 진실발견을 금과옥조로 삼는 나라의 법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좀체 이해하기 힘든 제도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고문이 자행되는 것을 방지하고 조직범죄의 공범자를 분리하여 처리함으로써 수사상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장점이 크다.

급조된 변론 팀은 팀웍이 맞을 수가 없다. 모든 일을 성실하고도 진지하게 처리하는 것을 일상의 수칙으로 실천하는 직업군인과 명문가와 명문법대 출신으로 잠시 경력을 쌓기 위해 군에 입대한 법무관 사이에 불협화음은 예상된 것이다.

갤로웨이 중령은 엘리트 코스에서 제외된 이류 법률가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경쟁적인 시장이 여성에게도 열려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성이 주도하는 군대와 법률가 세계에서 주류에서 벗어난 커리어를 굴욕적으로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팀장 다니엘 케대 중위는 불과 1년 전에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애송이, 야구와 농구를 일상적으로 즐기는 신세대 청년이다. 법무장관을 지낸 아버지는 법률가의 세계에서 전설적인 영웅이다. 그가 군에 입대한 이유는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정치의 세계에 몸을 담기 위한 예비전략일지 모른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군에 복무했다는 사실은 정치인에게는 중대한 자산이 되는 것은 미국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명색이 해군일 뿐 배를 타지 않는 해군, 법무관은 보조수이다.

적과 불과 4백 야드 거리에 주둔해 있는 해병 부대의 사령관 제섭 대령의 눈에 법무관들은 진짜 사나이 세상을 모르는 철없는 백면서생에 불과하다. 해병 사병도 마찬가지다. 장교 계급장에 대해 거수 경례를 붙이고 꼬박꼬박 써 (sir)자를 힘주어 쓰지만 기실 육탄전을 장기로 삼는 해병용사의 눈에는 해군 법무관 따위는 진짜 군인이 아니다.

엉성한 변호 팀이 여러 차례 충돌의 과정을 통해 정비된다. 이들은 다분히 형식적인 현장조사에 나간다. 부대에서 마주친 해병 장교들은 이들 조사단을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 다루듯 조롱의 눈으로 대한다. 가히 모욕에 가까운 대접을 받고 돌아온 이들이 갖가지 난관 끝에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성공한다.

신체가 허약하고 용맹이 부족한 산티아고 이병은 9개월 동안 14차례 전출을 신청했으나 묵살 당한다. 나중에는 전출해 주지 않으면 쿠바 군을 먼저 공격한 부대의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위협에 가까운 절박한 심경을 토로한다. 어 퓨 굿맨 부대 사령관으로서는 더 없이 치욕스러운 일이다.

부대장 제섭 대령은 "Code Red"를 발동하고 산티아고 이병은 과도란 린치를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 코드 레드란 자랑스런 해병부대가 겁쟁이를 사내로 만들기 위해 만든 일종의 자치규약이다. 체벌을 통해 해이한 정신상태를 바로 잡는 의식이다. 동료 사병들은 사령관에게 직접 탄원서를 보낸 산티아고 이병의 행동은 선임자-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으로 이어지는 명령지휘계통을 벗어난 불명예스런 행동으로 규정한다. 엘리트 집단일수로 집단 내부의 규율이 강하다. 사병들도 자신들을 사명감에 찬 명예집단으로 인식할 뿐, 그들 스스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조직윤리의 희생물임을 깨닫지 못한다.

영화 <어 퓨 굿맨>은 전쟁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 이행해 가는 20세기말에 사람들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제섭 대령이 법정에 소환되면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적군을 지척에 대면하고 있는 내가 목숨을 걸고 지켜 선물한 평화의 담요를 깔고 자는 너희들이 감히 나를 심판할 권리가 있느냐. 너무나도 당당한 전쟁의 미덕과 논리다. 당신은 법을 몰라. 야전군 부대장과 법무관 사이에 벌이는 논쟁은 전쟁의 법과 평화의 법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대, 자신은 절대 체벌을 명령한 일이 없다는 위증, 그는 평화시의 법 논리에 승복할 수 없고 그 오도된 자부심이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한다.

전쟁의 영웅은 법정에서 체포된다. 법원은 평화시의 분쟁해결의 상징물이다. 그의 법정 체포는 전쟁과 군인의 시대에서 평화와 법의 시대로 이행해 가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또한 전쟁을 매개체로 하여 배양되어 온 남성적 미덕 의 실체가 위선과 기만의 조직윤리임을 폭로하는 메세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내의 가슴속에 자리 펴고 있는 전쟁시대에 대한 은근한 그리움에 쐐기를 박는 의식이기도 하다. 군대는 전쟁이라는 한계상황에서 빛나는 남성적 미덕의 상징이고, 전쟁을 유념한 신체적 훈련은 남자의 육체적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야만의 의식일 것이다.

일찍이 2차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미국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던 맥아더의 전역의 변이 새삼 되살아난다. 자신을 해임시킨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결정에 불만이 없느냐는 언론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민간 질서가 군의 질서를 앞서는 것은 미국의 자랑스런 역사의 일부분이다.

영화는 코드 레드의 집행수였던 두 사람의 사병에게 가벼운 처벌과 동시에 전역처분이 내려지는 것으로 종결된다. 명백히 불법인 상관의 명령에 대해 거부할 의무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불명예 제대의 선고가 떨어지자 명예 에 죽고 살았노라고 자부했던 일병은 기막힌 표정을 짓는다. 그의 항의에 대해 다소나마 군과 인생의 연조가 깊은 상병은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을 위해 싸웠어야 할 의무를 지키지 못한 불명예가 죄 라고 답한다. 전쟁 중 양민학살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나라의 군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안경환<서울대 법대교수>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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