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리포트]배종태/한국기업의 약점

  • 입력 2000년 4월 16일 19시 29분


어느 기업이나 해외로 진출하면 많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 실리콘밸리의 한국 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언어 문제와 커뮤니케이션 기술 부족, 또는 국제화 마인드가 없거나 미국의 사업관행과 문화를 잘 몰라서 갖가지 문제가 생긴다. 가장 빠른 해결책은 현지인 경영전문가를 영입하거나 그들과 손잡고 함께 일하는 것이다.

국내 엔지니어와 실리콘밸리의 교포 사업가가 실리콘밸리에서 설립한 반도체 부품업체 A사는 획기적인 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작성한 사업계획서를 실리콘밸리 지역의 30여개 벤처캐피털 회사에 보냈지만 한결같이 투자를 거절당했다.

▼국내경력은 인정안해▼

이유는 단 하나. 창업팀들이 모두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 대학 출신이지만 이곳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한국에서 쌓은 경력과 실적만으로는 그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A사는 다행히 창업 후 1년 만에 미국 현지에서 기업투자가(corporate investor)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을 수 있어 한숨을 돌렸다. 그나마 파트너로 참여한 교포 사업가의 힘이 컸다.

코스닥시장에 등록된 중견 벤처기업 B사의 실리콘밸리 지사장 K씨가 통신용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기 위해 한 미국 PC업체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짧은 영어로 제품을 소개하자 담당 엔지니어는 제품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제품을 일부 수정해서 2주안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본사에서 제품이 도착한 것은 한달이 지난 후. K씨는 부랴부랴 미국 업체를 찾아갔지만 뒤늦게 도착한 제품은 주문한 것과 달랐다. 본사에 다시 수정본을 요구하는 등 7주나 시간이 흘렀고 거래는 결국 결렬됐다.

실리콘밸리의 사정을 잘 모르는 본사에서 내린 의사 결정이 지사 경영자들을 어렵게 한 케이스다. 이처럼 잠재적인 파트너들과의 협상 과정에서 본사에서 지원이 늦어져 협상이 깨지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난다. 이 때문에 단순히 미국의 시장과 기술 동향을 파악하려는 목적이라면 모를까 본격적인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지사보다는 독립법인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사실적은 본사에 귀속▼

지사 형태로 운영하다가 뒤늦게 독립법인으로 전환해도 현지에서 자금을 조달하거나 협상을 할 때 지사 시절의 실적은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지사의 영업 실적은 법적으로 모두 본사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 진출할 때는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서 아예 법인을 설립하는 게 낫다. 본사와는 지분 구조나 이사회를 통해 관계를 유지하면 된다.

▼객관적 사업계획서 중요▼

우리 기업이 겪는 어려움은 대부분 미국 시장과 경쟁자를 잘 모르는 데에서 출발한다. 한국 기업가들은 “우리 기술이 유일하고 경쟁자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제품과 서비스를 사용할 고객의 입장에서 시장을 바라보지 않고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나오는 얘기다. 하지만 시장과 경쟁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없는 사업계획서는 투자가들로부터 외면받기 십상이다.

막연히 제품의 시장이 10억달러라고 주장하기보다는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계 컨설팅회사나 시장조사 기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한 방법. 내용은 충실하나 구성이 잘 안된 사업계획서는 전문가들의 손을 거치면 훌륭한 사업계획서로 변신한다.

유명한 시장조사기관에서 나온 수치를 근거자료로 제시하면 사업계획서의 신뢰도가 더욱 높아진다. 유명 로펌을 파트너로 잡아도 벤처캐피털리스트들에게 접근하는 데 큰 힘이 된다.

배종태(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현 스탠퍼드대 객원교수)

ztbae@gsb.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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