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고개떨군 출구 조사

  • 입력 2000년 4월 14일 19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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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창피할 수는 없다. 과학적인 여론조사란 것이 이 땅에 도입된 이후 최대의 망신스러운 일이 엊그제 총선 개표방송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출구조사에 오차가 따르기로서니 방송사들이 서로 입을 맞춘 듯 하나같이 엉뚱한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까. 국제적인 여론조사학회 같은 곳이 있다면 보기 드문 출구조사의 실패 사례로 한시라도 빨리 보고되어야 하고, 또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물론 이번 선거에서 유난히 접전지역이 많았던 점, 한국적 특성상 응답자들이 실제 투표한 것과 다른 대답을 하거나 상당수가 응답을 회피했던 점도 이번 출구조사를 평가할 때 감안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출구조사를 담당한 여론조사기관들로서는 쏟아지는 비판의 소리가 다소 억울하게 생각될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여론조사기관들이 ‘프로’임을 자임한다면 이번과 같은 사례는 스스로도 용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해프닝은 비단 여론조사기관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 한표의 권리를 행사한 뒤 TV를 통해 개표방송을 차분히 지켜보는 것도 선거과정의 일부요, 민주주의를 몸소 체험하는 일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개표상황이 얼마 진행되지 않았는데도 최신 통계기법을 동원한 것이라며 후보자 이름 위에 ‘당선확실’ ‘당선유력’ 등의 표시가 TV화면에 나와 김을 빼곤 했다. 이번에는 한술 더 떠 오후 6시 투표 완료시간에 맞춰 아나운서들이 카운트다운을 해가며 결과를 곧바로 알려줬다. 유권자들이 개표 완료를 기다리며 밤늦게까지 가벼운 설렘과 흥분에 젖던 시절은 사라져 가고 있다.

▷이번과 같은 치명적인 오보(誤報)의 가능성을 안고 있으면서도 이런 위험천만한 방송관행이 계속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방송사들의 치열한 경쟁 때문이다. 방송사마다 서로 먼저 기선을 제압하려다 이번과 같은 무리수를 두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현대인의 조급증도 무시할 수 없다. 현대인들은 선거의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지를 못한다. 이번 해프닝은 ‘속도전’으로만 치닫는 우리 사회 자화상의 한 면이 아닐까.

<홍찬식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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