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現代의 中世的 비극

  • 입력 2000년 3월 28일 19시 41분


‘현대왕국’이 ‘왕자의 난’으로 시끄럽다. 왕회장의 총애를 받는 ‘몽헌왕자’가 잠시 해외 원정에 나선 틈을 타서 현대증권의 ‘익치장군’을 내쫓았던 ‘몽구왕자의 쿠데타’는 불과 사흘 만에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몽구왕자’는 왕회장의 ‘청운궁’을 하사받긴 했지만 현대경영자협의회 회장 자리를 빼앗김으로써 결국 ‘대군’으로 격하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익치장군’의 원직 복귀와 더불어 ‘몽헌왕자’는 왕위계승자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런데 정말 웃긴다. 지금이 도대체 어느 시대이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러시아 출신인 경희대 박노자 교수의 지적대로 우리 나라 재벌의 기업 상속 행위는 북한의 왕위세습과 다를 바 없다. 현대가 금강산 관광을 비롯해서 북한 관련 사업을 잘하는 것을 두고 ‘장군님’과 ‘명예회장님’의 세계관과 철학이 막상막하로 봉건적이라 배짱이 잘 맞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27일 재정경제부는 경영진 개편 등 현대그룹의 인사가 이사회 결의 등 적법절차를 밟지 않고 대주주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구시대적 가족경영 관행의 폐해라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헌재 장관도 현대그룹의 구조조정본부와 경영자협의회가 경영진 인사에 개입하는 것을 비판하고 정부 차원의 제재조처를 취할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런 위협에 흔들릴 ‘현대왕국’이 아니다. 소속 계열사 경영진의 ‘정씨 왕가’에 대한 충성심은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가 이익치 회장의 현대증권 복귀와 ‘몽구왕자’의 현대경영자협의회 회장 자리 해임을 발표했던 24일 오후 울산에서는 그룹의 핵심기업 가운데 하나인 현대중공업의 제26기 주주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장하성 교수를 비롯한 30여 명의 변호사 회계사 등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소속 소액주주들의 끈질긴 질문공세 때문에 10시에 시작된 이날 주총은 무려 11시간 만인 밤 9시경에야 끝이 났다.

소액주주들에게서 100만여 주의 의결권을 위임받은 참여연대는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정몽준 현대중공업 이사 등 정씨 일가와 현대중공업의 주식거래, 역외 펀드를 통한 자사주 관리 의혹, 부실 계열사를 돕기 위한 유가증권 취득 등 이사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은 가족경영의 폐해를 집요하게 따지면서 한때 6만원을 넘나들다가 3만원대로 떨어진 현대중공업의 주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경영진의 독립경영 의지가 불가결한 조건임을 강조했다. 회사측이 직원들을 동원하여 소액주주의 발언을 실력으로 봉쇄했던 지난해와 달리 정상적으로 주총을 운영한 점이 그나마 평가할 만한 일이기는 했지만 재무제표 승인, 정관 변경, 사외 이사 선임 등 다섯 번의 표결에서 참여연대의 제안을 모두 부결시킴으로써 독립경영 의사가 전혀 없음을 재확인했다.

가장 격렬한 공방은 다른 데서 벌어졌다. 참여연대 질문자들이 정주영씨의 이름을 거론한 대목이었다. 현대중공업의 조충휘 대표이사는 ‘큰 분’(정주영 명예회장)이 현대그룹의 뿌리라면서 “다른 건 몰라도 뿌리를 건드리는 발언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고 목청을 돋구었다.

직원 조회도 아닌 주주총회에서, 마치 정신훈화라도 하듯 ‘뿌리 경영론’으로 대주주 일가를 옹호하는 데 여념이 없는 대표이사의 모습, 현대중공업 주식의 외국인 소유지분이 6%에서 1%대로 미끄럼을 타고 주가가 반토막이 난 것은 당연한 사태인지도 모른다.

현대중공업의 주주총회를 보면서 현대(現代) 계열사들은 기업의 상호를 ‘중세(中世)’나 ‘고대(古代)’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잘못이 현대그룹과 정씨 일가에만 있는 건 아니다. 대우전자는 회사측이 소액주주들의 주총 참여 자체를 봉쇄하는 불법행위까지 부끄럼 없이 저질렀다.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증권회사 등 다량의 주식을 보유한 기관투자가들이 재벌그룹의 대주주에게 의결권을 위임하는 관행이다. 이른바 재벌의 ‘황제경영’을 종식하려면 이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대식의 중세적 비극’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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