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식의 과학생각]여자도 사냥을 했을까

  • 입력 2000년 3월 8일 19시 14분


세상을 멈추게 하고 바꿔라. 세계 여성의 날 92돌을 맞아 캐나다 스페인 영국 등 여성 단체들이 전세계 여자들에게 3월 8일 하루 동안 파업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내건 구호이다.

파업의 취지는 가정과 일터에서 여성들이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으므로 실력행사를 통해 남자들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자는 것.

여성단체들은 여자가 세계 노동의 3분의 2를 감당함에도 남자가 전체 소득의 95%를 거머쥔다고 주장한다. 엥겔스가 일찍이 “남성이 부르주아지라면 그의 아내는 프롤레타리아”라고 설파하지 않았던가.

세계여성 파업을 주장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노동 가치가 평가받지 못하는 주된 이유로 성차별주의를 꼽는다. 여성을 남성 아래에 두는 성차별주의는 여성을 오로지 어머니, 아내, 성적 배우자의 역할에 전념하게 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합리화한다. 따라서 급진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억압의 토대가 된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밝혀내는 생물학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다.

남자는 신체적으로 여자를 능가한다. 남자가 여자보다 10% 더 키가 크고 20% 몸무게가 많고 30% 더 힘이 세다. 또한 남자는 천성적으로 여자보다 공격적이며 타고난 난봉꾼이다. 따라서 사회생물학자들은 인류의 진화를 매춘 이론으로 설명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사냥하는 사내는 마냥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했으므로 그를 붙잡아두지 않으면 고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여자들로서는 음식과 섹스를 맞바꿀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 전개는 남녀의 성 역할이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축된 것이므로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생물학을 성차별 이데올로기라고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그러나 최근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남성중심적 이론에 도전하는 여류학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피메일리스트(femalelist)들이다.

가령 수렵채집 사회에서 칼로리의 대부분을 남자가 수렵한 동물이 아니라 여자가 채집한 식물로 충당했다고 주장한다. 계집이 고기의 대가로 알몸을 내맡길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피메일리스트들은 사냥꾼으로서 남자의 용도를 평가절하하는데 머물지 않고 남자가 여자보다 천성적으로 공격적이며 성적으로 난잡하다는 만고불변의 고정관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여자 역시 남자처럼 공격적이다. 러시아 카자흐 국경선 근처에서 발굴된 2500년 전 무덤에서 단검과 화살을 지닌 여자의 유해가 나왔다. 필요에 따라 여자들도 얼마든지 공격적인 임무에 종사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여자들도 사내처럼 성적으로 문란할 수 있는 기질을 진화시켰다. 클리토리스가 좋은 증거이다. 남자의 페니스는 배뇨와 생식의 두 기능을 수행하지만 클리토리스는 오로지 오르가슴을 위해 존재한다. 게다가 수렵채집 사회의 여인네들은 동성애를 즐기고 자위하는 기교를 터득했다. 요컨대 사내들만을 성적으로 난잡한 동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피메일리스트들은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는 한편으로 인류 진화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여 아득한 먼 옛날 인류의 암컷들이 수컷과 함께 수렵채집 사회에서 대등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매춘 이론을 전면 부정하는 셈이다. 피메일리즘의 새로운 여성관이 페미니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고 볼 일이다.

이번 여성 파업운동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몇몇 사회 지도층 여성들의 개인적 야망을 위해 세계 여성의 투쟁이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박은 점이다. 평범한 가정주부나 여성 근로자보다는 중산층 여성 지식인 중심으로 전개되는 우리나라 페미니즘 운동과 반드시 무관한 이야기만은 아닌 듯싶다.

비례대표 여성 30% 할당제 덕분에 국회 진출이 예약되거나, 호주제 폐지 주장으로 엉겁결에 진보적 지식인의 반열에 오르거나, ‘김최○○’ 식으로 어머니 성씨까지 구태여 밝히는 여류명사들이 모두 파업에 참여했는지 궁금하다. 그들의 바깥양반들로부터 후일담을 듣고 싶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의 내자는 파업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여인네올시다.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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