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JP의 엄지손가락

  • 입력 2000년 3월 7일 20시 06분


김종필자민련명예총재의 살림이 몹시 곤궁한 기색이다. 지역주의와 색깔론이라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조자룡 헌 칼 쓰듯 휘두르는 최근의 발언을 보면 급해도 이만저만 급한 게 아닌 듯하다.

▼지역주의-색깔론 극에 달해▼

1월에 총선시민연대가 그를 공천 부적격자 명단에 올려놓았을 때만 해도 제법 여유가 있었다. “무슨 나라가 이러나. 걱정이다.” “이보다 더한 일도 겪었는데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이렇게 일신의 안위를 뒤로 한 채 자나깨나 나라 걱정만 하는 애국자 행세를 했다.

‘이보다 더한 일’이란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발하다가 권부에서 잠시 밀려난 일과 전두환 일파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에서 강제 퇴출당했던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JP는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그가 과거에 겪었던 일은 ‘이보다 더한 일’이 아니라 ‘이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그를 ‘박해’한 것은 총칼로 권력을 탈취한 정치군인이요, 독재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은퇴를 권고한 것은 논리의 힘과 국민의 성원밖에는 가진 것 없는 시민단체들이었다.

공동여당의 공조가 깨지고 차기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이인제민주당선대위원장이 ‘충청도 대통령 만들기’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자민련의 본거지에 대한 역공을 시작하자 JP는 자신의 정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제 ‘나라 걱정’은 뒷전이다. 자신의 발언이 ‘나라를 어지럽고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비판은 안중에도 없다.

2일 부여에서는 김대중후보가 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이 지역감정의 발단이라고 주장했다. 알다시피 당시 DJ는 김영삼 이철승씨 등을 상대로 한 치열한 경선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야당 후보가 되었다. JP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 영남 출신 독재자가 종신집권 체제 구축을 획책하고 있던 마당에 DJ가 호남 출신이라고 해서 출마를 포기했어야 옳았다는 말인가? 그러고서도 이것이 “지역감정을 유발하거나 돋우기 위해서 한 얘기가 아니다”라고 한다. 남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놓고는 아프게 하려고 한 짓이 아니라니, 도대체 누가 이 말을 믿겠는가.

그런데 충청도를 공략하는 이인제씨 역시 충청도 출신. 그래서 지역주의 선동만으로는 약발이 신통치가 않다고 느꼈는지 나흘 후인 6일 강원 홍천-횡성지구당 창당대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JP의 정치적 상상력은 55년 전의 해방공간으로 시간여행을 했다. “모스크바에서 찬탁 반탁을 논의할 때 우리는 반탁을 주장했으나 그 사람들은 찬탁을 했으며, 그런 사람들이 (왼쪽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이런 자리에 있다.” JP의 왼쪽 엄지손가락은 도대체 누구를 겨냥한 것일까. 혹시 김대중대통령? 서영훈민주당대표? 찬탁을 했다면 분명히 70대 노인일 터, JP에게 물어 보자. 그게 누군가.

또 “진보주의자가 장관이 되더니 6·25때 왜 대항했느냐고, 그래서 통일의 기회를 놓쳤다고 했다”니? 김대중 정부의 장관들 가운데 그런 한심한 말을 용감하게 할 만큼 무식한 인물이 있었을 것 같지 않은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당연히 누가 언제 어디서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밝혀야 한다. 하지만 JP는 그걸 밝히지 않는다. 그의 색깔론은 그래서 ‘팥소 없는 찐빵’이요 ‘스테이크 빠진 햄버거’다. 그는 이런 함량미달의 불량식품을 ‘애국’의 이름으로 포장해서 팔고 있는 것이다.

▼근거와 실체도 함께 밝혀야▼

정치적 선동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여권과 총선시민연대의 ‘유착설’과 ‘음모론’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JP의 ‘지역감정 DJ 책임론’과 ‘반탁 찬탁론’도 사실적 근거와 실체가 없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선동이 JP와 자민련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기존 정당들 가운데 ‘색깔론’이나 지역주의, 또는 그 둘 모두를 선동한 죄에서 자유로운 정치세력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지면사정상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양두구육(羊頭狗肉)적 행태나 ‘영도다리론’과 ‘영남정권론’ 등으로 정치적 스트리킹을 벌이는 민국당의 망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한 가지만 말하자. 김종필씨의 ‘명예퇴직’, 아직도 너무 늦지는 않았다.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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