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28)

  • 입력 2000년 1월 19일 20시 13분


야근을 하고 돌아와 보니 개가 잠들어 있었어. 캔을 따서 그릇에 옮겨 담아 내밀어 주었는데도 고개를 다리 사이에 파묻고 있었어. 나 혼자 앉아서 한 잔 했을 거야. 날이 새고 많이 취했으니까. 만져보니까 뻣뻣하더라. 한스를 비닐에 싸고 종이 박스에 넣어서 들고 나갔어. 공원 근처로 한참이나 걸어 갔는데 노란 칠의 쓰레기 차가 보였어.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가서 꽁무니를 쳐든 차의 화물칸에 던져 넣었어. 그러곤 돌아와 죽은 듯이 잤지. 오후에 깨어 보니 한스가 없는 거야. 나는 나중에야 새벽에 내가 갖다버린 걸 알았을 정도야.

그만 둬요.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날마다 죽은 개 타령만 할거예요?

슈테판과 나는 아기를 가진 적이 있어. 낙태했지만….

나는 다음 장을 넘기고서야 거기에 사각형과 삼각형이 겹쳐진 몸통에다 선을 그은 동그라미를 보았어요. 마리의 치마 위에 상자가 겹쳐져 있는 거죠. 그건 한스가 들어있는 상자가 아니라 아기의 죽음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어요. 대신에 이렇게 말했죠.

노년은 적막하지만 평온해진다는데.

마리는 다시 웃었어요.

그건 거짓말이야. 그런 척 할뿐이지. 모양만 다를 뿐 마음은 전과 같아. 남자와 자구 싶은 것 두 그래. 다만 한 가지 알게 되는 게 있어.

뭐예요 그게?

가장 좋았던 때,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슈테판 말예요?

아기 말이야. 나는 어머니가 되다 만 할멈이야. 슈테판은 내 아들이기도 했어.

그때 나는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르르 하는 전율이 지나갔어요. 갈뫼의 어두운 마루 구석에 먼지가 케케 묻은채로 남아있을, 그 해 여름 내가 그린 젊은 당신의 초상을 생각해 냈어요. 그 순간에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구십년대의 막바지에 돌아와 내 얼굴을 당신의 어깨죽지 뒤쪽에 그려 넣을 때 나는 실패한 당신의 어머니였음을 알게 되요. 그리고 그 인과로 나는 죽어갈 거예요.

다시 가을이 오고 가고 이 선생과 나는 전처럼 애가 달아 공원을 오가며 서로의 집을 찾지는 않고 보다 생활적으로 바뀌었고 나는 일주일에 한 점씩 그려낼 정도로 작품에 몰두했습니다. 그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맘때에 다시 당신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주방의 간이식탁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갈색으로 변해서 떨어지는 칠엽수 나뭇잎을 내다보다 문득 당신이 저 아래 마당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보기도 했어요. 물론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미망이 틀림없었지만. 내가 어떤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면 그건 당신에게가 아니라 오히려 이희수씨에게 갖고 있답니다. 나는 편안했으므로 그를 사랑했어요. 잠자리의 머리맡에 놓인 한 잔의 물처럼 그이는 내 가까이에 있었어요. 그런데 기묘하게도 당신이 다시 나를 찾아올 그 무렵에 그는 나를 떠나게 됐어요. 아마 내가 벌을 받았는지.

독일의 통일은 시월에 이미 예정되었던 대로 완료되었습니다. 이 선생은 체류기한이 다 되어 귀국을 준비하기 시작했구요 나도 처음에는 마이스터 때려치우고 돌아갈까 생각했어요. 장벽이 터지던 때로부터 꼭 일 년 만이었는데 그 해에는 한파가 몰아닥쳐서 두터운 오리털 코트를 늘 입고 다닐 정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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