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심규선/日 '流産 충격'

  • 입력 1999년 12월 31일 19시 05분


일본의 세밑은 우울했다. 마사코(雅子·36)황태자비의 유산소식 때문이었다. 20일 전 임신사실이 알려졌을 때 일본사회가 흥분에 휩싸였던 것을 감안하면 무리도 아니다.

황태자비는 지난달 30일 밤 궁내청 병원에서 임신여부에 대한 최종검사를 받았다. 궁내청은 즉각 기자회견을 갖고 “유감스럽지만 황태자비는 유산 진단을 받고 곧바로 수술을 받았다. 수술경과는 좋으며 건강상태도 양호하다”고 발표했다. 또 “황태자 부처는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으며 유감스러워는 했지만 침착하다”고 덧붙였다.

궁내청이 유산소식을 즉각 발표한 것은 황태자비의 임신을 고대하던 국민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새 천년 벽두보다는 흘러가는 해에 충격도 함께 묻어 보내자는 배려였을 수도 있다.

일본 신문의 보도태도에서도 그런 마음씀씀이가 엿보였다. 모든 신문들은 유산사실과 함께 ‘국민의 목소리’도 전했다. 많은 일본인들은 “너무 안됐다. 이제는 건강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다음을 기다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런 것들을 보며 ‘황실은 과연 일본인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전전(戰前)에 천황은 일본인들에게 신(神)같은 존재였다. 전후(戰後)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처럼 됐다는 것이 일부 일본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어떤 서방언론은 천황일가를 유명 연예인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국을 잘 아는 한 일본인 대학교수는 황실이 한국의 종가(宗家)와 같다고 말했다. 평상시에 종가를 의식하고 살지는 않지만 종가가 잘 되면 기분이 좋고 무시 당하면 기분이 나빠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천황 방한 때 만약 ‘불상사’를 당하면 내각이 모두 퇴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인도 있다. 황실이 종가 이상인 것은 틀림없다.

심규선〈도쿄특파원〉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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