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양기대/여권 '先言後行' 악습

  • 입력 1999년 12월 16일 19시 28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뭔가 생각이 있으면 참지를 못하고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다.”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16일 이렇게 얘기하며 최근 김대통령의 ‘공동여당 연내 합당결론 희망’발언이 성급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합당문제는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가 21일 남미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뒤 김대통령과 김총리가 만나 결론을 내리는 게 당연한 순서인데도 김대통령이 미리 언급하는 바람에 자민련측 반발만 자초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현 정권 담당자들이 말만 앞세우는 사례가 많다보니 현 정권을 가리켜 ‘선(先)말, 후(後)행 정권’ ‘시나리오 정권’이라는 혹평마저 나오고 있다.

합당문제만 해도 올초부터 여권 내에서 끊임없이 제기됐으나 1년이 다되도록 계속 ‘진행 중’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 과정에서 합당론을 주장했던 국민회의 설훈(薛勳)의원 등이 김총리의 ‘미움’을 사 당직에서 물러나는 일도 벌어졌었다.

지역감정 타파를 위한 정계개편도 ‘시나리오’만 무성했을 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여권은 지난해 정권출범과 함께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측과의 이른바 ‘민주대연합’을 추진했으나 그 과정에서 김전대통령과의 관계만 악화됐다. 그 후 대구 경북지역과의 지역연대를 통한 ‘동서화합형’ 정계개편도 추진했으나 여권 인사들의 말만 무성했을 뿐 아직껏 지지부진한 상태다. 사태가 이에 이른 데는 여권 핵심인사들이 ‘정치적 희망사항’에 대해 치밀한 사전준비나 계획없이 말부터 하고 보는 야당 때의 체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정치권 안팎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정권담당자가 실천보다 말에 더 무게를 싣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데도 정권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양기대<정치부>k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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