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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2월 1일 19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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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담의 중심가에만 젊은이들이 북적대고 있을뿐 조금만 중심가를 벗어나면 작은 가로와 골목은 텅 비어 있었어요. 오래된 아파트들은 낡고 칠이 벗겨져 있었는데 동독 쪽에서 석탄을 때는 노란 연기가 안개처럼 흐린 하늘로 번져 올랐지요. 베를린은 이를테면 우리네 비무장지대나 같은 곳이지요. 아니면 서로 다른 건축물이 맞닿은 완충 지대에 있는 회랑 같은 장소였다고나 할까. 나는 이 중립적인 성격의 도시가 마음에 들었어요. 남과 북은 나의 전면과 등 뒤처럼 상반된 방향이지만 동과 서는 그냥 똑같은 측면일 뿐이잖아요. 고개만 돌리면 해가 떠오르고 다시 돌리면 해가 저물고 있겠지요. 하지만 하늘의 노을은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은 아닐거예요.
나는 첫날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도시의 중심가에 내려서 다른 여행자들처럼 초조하고 분주하게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아다닐 생각도 없이 그냥 흔한 이태리 식당이나 모퉁이의 작은 카페에 앉아서 거리를 내다보았습니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정적과 긴장된 공간감은 계엄령이 내려졌던 우리들의 시청 앞 광장보다 더 깊은 침묵에 잠겨 있는 듯했지요. 그곳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금지되어 있던 또 다른 세계로 향한 창문이었다는 걸 알게된 것은 기묘하게도 장벽이 무너진 뒤의 일이었지만요.
내가 머물던 곳은 장벽 근처의 작은 팬션이었는데요 주인이 아마 아랍 사람인 것 같았어요. 벽에 아라베스크 무늬의 타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구요 원색의 큰 도자기들이 거실에 놓여 있었어요. 손님은 별로 없었어요. 아침을 먹으러 거실로 나가면 배낭여행 중인 영국 학생들 몇 사람과 중년의 터키인 부부 뿐이었지요. 내가 방에 들어가서 거리로 향한 창문을 열었을 때 잠깐 충격을 받았던 게 생각나요. 두터운 커튼을 젖히고 캄캄하게 어두운 유리 창문을 여니까 그 밖에는 나무판자의 덧문이 닫혀 있었어요. 덧문을 밀어버리자 차갑고 습한 바람이 들어왔지요. 그리고 눈 앞에 거대한 회색의 벽이 나타났어요. 그 벽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다보아도 끝이 보이질 않았어요. 가슴을 콱 떠미는 듯한 답답한 느낌과 무력감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현상 세계에 물건으로 구체화된 것이었어요. 나는 우리나라에서는 휴전선 근처에 가본 적이 없지만 비상훈련 때마다 무장을 한 초병들이 버스에 올라 검문을 하던 날의 무력감은 생각이 나요.
벽은 그것이 무기물질이라는 것을 완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치의 빈틈이나 구멍도 없이 그냥 무뚝뚝하게 서있었습니다. 아무 장식도 없이 회색의 돌덩이가 되어 거리를 막고 서있는 벽체 곳곳에 삐져나온 철근이 보였지요. 나는 벽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숙소에서 나가 골목길을 돌아서 오랫동안 그늘이 져서 이끼까지 앉은 서독 측의 건물들이 늘어선 막다른 가로에 들어섰어요. 쓰레기통만 입구에 늘어서 있을뿐 사람들은 이미 이전의 현관이나 통로를 이용하지 않고 건물의 반대편으로 드나들고 있는 것 같았지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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