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1999년 11월 4일 19시 20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작년 2월 검찰이 발표한 국제 산업스파이 사건은 한국 전자 통신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과 LG반도체의 전현직 연구원들이 64메가D램 핵심 기술을 대만 경쟁업체에 고스란히 팔아넘기려다 사전에 들통났다.
89년 삼성전자를 퇴직한 한 연구원이 벤처기업을 세운뒤 삼성전자와 LG반도체에 근무하는 연구원을 상대로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우트를 제시해 반도체 설계도면과 회로도 등 기밀자료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기밀을 빼냈다.
한국 기업 가운데 내로라할 정도로 일류급 보안을 유지하던 삼성전자 등이 ‘사람 보안’에 소홀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당시 안전기획부의 내사 자료를 제공받아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이들이 회로도 등이 담긴 디스켓과 문서를 가지고 출국하는 순간 검거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땀흘려 만든 반도체기술이 다행스럽게 해외로 유출되지는 않았다. 이 때 반도체기술이 대만으로 유출됐다면 국가 경제적으로 6조원의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업계는 추산한다. 이제 한국 기업들도 국가를 넘나드는 산업스파이로부터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미국 산업안보협의회(ASIS) 조사에 따르면 95년 미국내 산업스파이 사건은 92년에 비해 약 4배로 늘어났다.
산업스파이 사건으로 인한 미국 기업의 피해액수는 연간 250억달러로 추정되고 있다.
세계경제 무대에서 산업스파이 사건이 이처럼 해마다 급증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까지 산업스파이 사건에 대응하는 법률조차 변변히 마련하지 않고 있다.
한국은 91년 12월 부정경쟁방지법을 개정해 처음으로 영업비밀 보호규정을 두었으나 실제 적용된 사례는 거의 없다.
삼성반도체 기술 유출사건이 발생한 후 이 법이 영업비밀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다는 여론이 일면서 지난해 12월 기존 부정경쟁방지법을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로 개정해 올해부터 시행하고 있다.
이 법은 영업비밀을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비밀이 유지되고 있는 생산방법 판매방법 또는 기타 영업활동에 유용한 기술상 또는 경영상의 정보’라고 규정해놓았다.
영업비밀을 유출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고 외국에서 사용될 것을 알고 유출한 경우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을 물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법률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은 해당 기업의 전현직 임직원만을 처벌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같은 정보기관 요원이 국내 영업비밀을 훔쳤을 때는 현실적으로 처벌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법률가들의 견해이다.
국가정보원은 최근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기업에 의한 산업스파이 활동이 크게 늘고 있다고 보고 산업기밀보호 강화를 위해 관련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영업비밀 보호에 대한 기업들의 안이한 태도도 여전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 보안’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업무고과 평가에는 보안관련 사항을 찾아볼 수 없다. 보안교육과 관련된 정규 교육프로그램도 있으나 마나다. 퇴직자들에 대한 사후교육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반도체 전자 등 기술개발 경쟁이 치열한 업체에 몸담았다 퇴직하는 직원들에게 영업비밀보장 서약서를 받는 외국과 대조적이다.
미국은 산업스파이에 대한 처벌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추세다. 96년 산업스파이법을 새로 도입해 외국 정부가 직접 저질렀거나 지원한 산업스파이 행위에 대해서는 미국내 기업간 영업비밀침해 행위보다 더욱 강하게 처벌하고 있다. 외국의 정부 기업 개인이 개입됐을 때 산업스파이법이 적용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영업비밀도용 조항이 적용된다.
외국과 관련된 사건에서 개인이 영업비밀을 도용하거나 파기하면 50만달러의 벌금 또는 10년 이하 징역에 처하도록 엄하게 규정돼 있다. 단체는 1000만달러의 벌금이 부과된다. 미국기업의 스파이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은 25만달러의 벌금 또는 10년이하 징역을, 단체는 500만달러의 벌금형을 적용해 상대적으로 처벌이 가볍다.
특히 산업스파이법은 미국 밖에서 발생한 범죄일지라도 행위자가 미국인, 영주권자, 미국 단체일 때에도 처벌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업들은 선진외국의 기술을 도입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따라서 자체 개발해 보유하고 있는 산업기술을 보호하는 일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한국도 이제는 정보통신 전자 분야 처럼 선진기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술을 보유하는 업종이 늘고 있고 우리 기술을 배우기 위해 산업기술연수를 목적으로 들어오는 해외인력이 늘고 있어 기술보호에 대한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태평양 법무법인 황보영 변호사는 “21세기에는 기술이나 영업노하우와 같은 무형의 영업비밀이 국가간 경쟁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며 “이같은 추세에 맞춰 국내 기술 보호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치영기자〉higgledy@donga.com
▼전문가 한마디▼
21세기에 무형의 기술이나 지식은 형태가 있는 상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 거래대상이 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영업비밀은 이같은 무형의 지식을 ‘자산화’하는 중요한 법률적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지적재산권 보호를 강화하고자 하는 국제적인 움직임에 힘입어 영업비밀의 범주가 확장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침해행위에 대한 처벌 또한 강화되고 있다.
이같은 법률적인 추세에 따라 앞으로 한국 기업들도 모방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개발된 기술을 적극적으로 보호해 나가는 전략을 마련할 도리 밖에 없다. 이같은 시대적 요구를 신속하고 적절하게 충족시키는 기업만이 치열한 기술경쟁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황보영〈법무법인 태평양 지적소유권팀변호사〉
▼국내기업 43.3% "기밀정보 외부유출 경험"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국가정보원의 협조를 받아 전국 기업과 연구소 임직원 1040명을 대상으로 ‘기업의 산업보안의식’을 조사했다.
이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내 기밀정보가 외부로 유출돼 어려움을 겪은 기업이 전체 조사대상기업의 43.8%에 이르렀다.
산업스파이가 표적으로 삼는 주요 정보로는 제조기술(71.0%)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사업계획정보(12.5%) 판매 및 시장정보(8.6%) 순이었다.
산업스파이가 산업기밀을 빼내기 위해 사용하는 수법은 스카우트(42.8%)를 가장 많이 활용하고 있었으며 매수(17.1%) 복사(13.3%) 등이었다.
한국에서 산업스파이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하는 기업으로는 조사 대상의 59.7%가 국내에 진출한 외국합작기업 또는 외국기업으로 꼽았고 국내기업이라고 대답한 응답자는 34.4%였다.
한국 기업들이 느끼는 산업기밀 보안관리상의 가장 취약한 분야는 설계도면 등 문서보안분야(31.1%)였으며 다음으로 연구원 등 사내인적자원 보안분야(27.4%) 전산망 등 정보통신분야(25.4%) 등이었다.
특히 사내 인적자원 보안분야의 취약성은 96년 조사 때보다 7.4% 늘어나 지난해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 여파로 연구원이 대량 감원되면서 정보유출이 많아진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 업계는 산업기밀 유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추진해야 할 대책으로 △기업체의 보안관리 능력 제고를 위한 지도활동 △산업스파이 처벌을 위한 적극적인 법률 제정 △국내 산업계의 공정한 경쟁문화 정착 등을 들었다.
〈신치영기자〉higgledy@donga.com
▽특별취재팀〓황호택(기획팀장) 고미석(기획팀) 박래정(정보산업부) 홍석민(〃) 신치영(경제부) 이희성(국제부) 김갑식(문화부) 정성희(사회부) 최영훈(〃) 이성주(생활부기자)
▽법률지문 및 자료 도움〓법무법인 태평양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