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은령/음란의 한계는 어디까지…

  • 입력 1999년 10월 25일 19시 11분


신문 연재소설에 조금이라도 야한 성묘사가 실리는 날이면 문화부에는 항의전화가 빗발친다. ‘노한 목소리’ 중 난감한 것은 “댁의 아이라면 이걸 보라고 놔 두겠느냐”는 질문이다.

탤런트 서갑숙씨의 성체험 고백에세이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파문의 원점에도 이 질문이 있다. 검찰의 ‘음란성’ 여부 내사의 대전제가 ‘사회의 안녕을 위해 막아야 할 유해환경’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년간의 사례는 검찰의 ‘개입’을 비웃는 것 같다. ‘즐거운 사라’의 마광수교수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으며 작가와 출판사대표가 처벌받은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영화 ‘거짓말’로 만들어져 화제다.

당국의 제재가 외설시비 당사자의 ‘반성과 자숙’보다는 새로운 추종자를 낳는 것으로 귀결되는 모습은 현실과 법사이의 괴리 때문이다. 초등학생까지도 ‘O양 비디오’를 얘기하는 상황에 몇몇 ‘야한’ 작품을 엄단하는 것만으로 ‘도덕 재무장’의 실효를 거둘 수 있을까.

‘나도…’를 사본 사람들 사이에 이미 “가치없다” “사 볼 필요없다” 심지어 “시시하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자율적 거름장치는 검찰의 개입 순간 ‘성담론의 진보 대 보수’ 구도의 이데올로기 논전에 묻히고 만다.

‘아이에게 보게 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민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다. 아이의 성적 판단력 기르기는 안방에서 시작돼야 한다. 파문의 주인공 서씨도 두 딸에게 보낸 책 속 편지에서 초등학생용 성교육책을 사준 사실을 상기시키며 “책을 통해서나마 꼭 필요한 지식을 섭취했으면 한다”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표현의 자유’ 중 일부는 ‘표현하는 자’ 스스로 유보할 수는 없는 걸까.

정은령<문화부>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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