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1999년 10월 12일 18시 42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정부의 책임이 적지 않겠지만 85%와 77%는 지나치다고 본다. 그렇다고 압도적인 정부책임론에 대해 ‘말도 안되는 억지’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없다. 군수나 은행지점장 선에서 처리할 일, 내버려두면 민간이 알아서 할 일까지 장관이 나서서 비틀고 그도 모자라 대통령이 직접 감놔라 배놔라 챙겨온 역대 정부의 업보 아닌가.
김영삼(金泳三)정부로부터 환란(換亂)을 물려받은 현정부는 관치(官治)금융을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꼽았다. 이 나라도 드디어 관치금융 해방구(解放區)가 되는가 기대했다. 그게 DJ노믹스의 손꼽히는 키워드였으니까. 하지만 관치의 농도는 짙어만 간다. 숨이 넘어갈 지경의 환자들이 응급실로 실려간 상황에선 인턴 레지던트 제치고 수술 순서도 바꿔 내과과장 외과과장에 병원장까지 메스를 들고 나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환자가 통원치료를 받을 정도가 됐는데도 여전히 과장들이 나서서 치료약 챙기고 음식메뉴까지 따지는 형국이다. 지금의 금융시장 모습이 꼭 그렇다.
그러니 환자들은 재채기만 나도 “과장들은 뭐하고 있는 거야. 공짜약 더 안주면 나 죽어”라고 난리다. 이헌재(李憲宰)금융감독위원장이나 강봉균(康奉均)재정경제부장관은 일부 투신사 투자자 등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현상에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강장관은 지난주 어느 자리에서 “고수익엔 고위험이 당연한데 정부가 시장의 심리적 불안까지 책임을 져야 하니…”라고 탄식했다. 그러나 어쩌랴. 시장의 버릇을 잘못 들여놓은 자승자박인 것을. 더구나 총선은 다가오고….
진작 정부가 나설 일과 개입하지 않을 일을 분명히 구분해 선언하고 불안조짐이 좀 보이더라도 원칙을 지켰더라면 무책이 상책일 수도 있다. 정부가 선을 넘는 일은 결코 안한다는 것을 부동(不動)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시장의 투명성만 높였다면 대우와 투신사 해법도 좀더 단순명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의 뿌리는 못말리는 관치체질에 있다. 경제관료들은 시장에 별 문제가 없더라도 뭔가 일거리를 찾아내 힘을 미치려고 몸부림친다. 금융뿐만 아니라 기업 및 산업정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관료들은 ‘대우와 투신사문제가 그냥 내버려둘 작은 일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물론 작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관치의 악순환이 문제를 더 키웠음을 시인해야 한다. 또 관료들은 시장에 대해 결코 전지전능 무소불위가 아니다. 강장관은 최근의 금융상황을 ‘시장의 심리전(心理戰)’이라고 풀이했지만 관계당국은 심리전에서도 뒷북치기에 바쁜 처지다.
총체적 관치체질에다 각 부처와 그 보스들의 파워게임이 해법을 더 꼬이게 한다. 정책권력의 제로섬게임 속성을 무시하긴 어렵다. 그러나 기왕에 던져진 문제를 풀지않을 수 없다면 내 자리 내 부처 차원을 넘어서야 정책의 혼선과 시행착오를 줄이고 시장의 믿음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미국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책의 실패와 차질에도 불구하고 민간부문이 자율적 효율을 높여왔기 때문이다.’ 지난달 타계한 미국 경제학자 허버트 스타인은 역대 미국정부 경제정책에 관한 저서 ‘대통령의 경제학’에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는 또 ‘정책당국자들의 겸손’과 ‘열린 경제토론 및 사회적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전철환(全哲煥)한국은행총재는 최근의 강연에서 “장기간 정부주도로 경제개발을 추진해옴에 따라 경제주체들의 자율성이 약화되고 위의 지시만 기다리는 타율성이 체질화된 측면이 많다”고 말했다. 이러다보니 정부의 보호와 지시를 바라는 ‘피터팬 증후군’마저 나타나고 있다는 진단이다. 몸은 어른이 됐지만 여전히 어린이로 남아있기를 원하며 그런 대우와 보호를 받으려는 심리를 일컫는다. 정부가 무한개입의 빅브러더 신드롬(큰형 증후군)을 극복해야 국제적으로 결코 통용될 수 없는 피터팬 신드롬도 사라질텐데….
배인준<논설위원>injoon@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