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임연철/비운의 북관대첩비

  • 입력 1999년 6월 28일 19시 34분


1592년 발발해 1598년 끝난 임진왜란 기간중 크고 작은 전투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지만 기록으로 전하는 주요 전투는 100회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 중 한산도대첩이 포함된 16회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참전한 전투이고 모두 승전한 것을 보면 임진왜란에서 이 충무공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쉽게 짐작이 간다.

▽바다에서 이 충무공이 승첩을 거듭하는 동안 육전에서도 진주대첩 행주대첩 등 큰 승리가 이어져 왜적을 패퇴시켰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왜군을 함경도 일대에서 결정적으로 몰아낸 북관대첩(北關大捷)은 백과사전에나 간략히 소개돼 있을 뿐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북관대첩의 주역 정문부(鄭文孚)는 100회의 임란 전투에서 4회나 의병장으로 활약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북관대첩은 조선 숙종 당시(1709년)이미 함북 길주(吉州)에 대첩비가 건립될 만큼 그 의미가 높이 평가됐었다. 그럼에도 북관대첩은 지역적으로 이북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인데다 일제가 대첩비를 1905년 강탈해 간 탓인지 ‘잊혀진 대첩’이 되고 말았다. 도쿄(東京)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돼 있던 북관대첩비가 민간의 끈질긴 노력끝에 94년만에 환국된다는 본보 보도는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우선 민간의 노력으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귀환하게 됐다는 점이 주목된다. 아직도 많은 문화재를 일본에서 돌려받아야 하고 프랑스로부터는 외규장각 소장품을 반환받아야 할 정부 당국의 교섭자세에 분발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북관대첩비가 남한측 인사들의 노력으로 돌아오지만 계획대로라면 판문점을 경유해 원래있었던 북한의 길주로 간다는 점도 의미 깊다. 남북간 첫 문화재 내왕을 계기로 민족의 공동 유산인 남북 문화재 교류전시가 이뤄졌으면 한다.

임연철<논설위원>ynch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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