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소동기/「땅콩」 김미현에 보내는 갈채

  • 입력 1999년 5월 26일 19시 37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로 온 국민이 주눅이 들어 있을 때 박세리는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세리가 양말을 벗어젖히고 연못에 들어가 날린 트러블샷은 4천5백만의 체증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청량제였다. 우리는 세리를 보고 환호했다. 세리의 굿샷 하나에 웃고 세리의 미스샷 하나에 울었다. 세리의 퍼팅에 탄성을 지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 언론이 세리에 대해 대서특필한 기사를 읽으면서 한국인은 하나같이 어깨를 으쓱댔다.

그런데 박세리가 올해들어 슬럼프에 빠졌다. 이 때문에 풀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세리가 미스샷 할 때마다 시름이 늘고 대회가 끝날 때마다 이마에 주름이 느는 듯하다.사람들이 세리의 골프에 대해 막무가내로 실망하고 있을 때 최경주 프로가 일본에서 2번째 우승을 거머쥐어 상금 랭킹 3위에 올라섰다. 박지은은 전미대학체육협회 여자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여자아마추어 골프대회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땅콩 김미현은 미국 여자프로골프투어에 진출한 이래 최고의 성적인 3위에 진입했다.

아마도 지난 한해동안 박세리의 솟구침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최경주의 우승이나 박지은의 그랜드슬램 달성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겨우 3등을 한 땅콩 김미현에게 찬사를 보내자고 말한다면 뺨맞을 소리하지 말라고 경고를 받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땅콩 김미현에게 찬미를 보내고 싶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에 기록된 땅콩의 키는 1백57㎝, 몸무게 53㎏. 키가 1백70㎝이고 몸무게가 68㎏인 세리와 비교해 보면 땅콩이란 별명은 기가 막히게 지어진 것이란 느낌이 든다. 땅콩에게는 후원사도 없다. 비행기 탑승료가 부족해 중고밴을 타고 대회장을 찾아다닌다. 때로는 길가다 밥지어 먹고 이슬에 젖어 새우잠을 잔다. 그럴싸한 교습가로부터 레슨을 받은 적도 없다. 그 때문인지 골프를 아는 이들마저도 그녀의 스윙이 개성적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되레 매끄럽지 못함을 지적하며 폄훼하려드는 경향이 없지 않다. 아마도 세리와 달리 땅콩에게 아직도 후원사가 없는 가장 큰 이유도 그녀의 이런저런 핸디캡을 먼저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리라.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번주에는 5등을 하더니만 지난주에는 3등을 했다. 10라운드를 연속해서 언더파를 기록하고 어떤 라운드에서는 6언더파를 치기도 했다. 쓰러질 듯 휘두르며 드라이버샷 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땅콩의 스윙에서는 보면 볼수록 골프의 진국이 배어나오기에 대견스럽다. 자그마한 키가 더 작아 보이라는 듯이 모자를 눌러 쓴 모습이 재미있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인터뷰할 때마다 보이는 땅콩의 웃음에는 체격에 비해 넉넉하고 풍요로운 여유가 있다. 그래서 우승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따라서 우승 아니면 눈길을 주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감히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땅콩 김미현의 골프에 찬사를 보내자고 외치고 싶다.

홀을 향해 날아가는 볼을 지켜 보는 땅콩 김미현의 눈매에 어쩐지 외로움과 우수가 서려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가슴에 담고 있는 새내기의 서러움이 스며나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박세리에게 보냈던 기대와 성원의 절반만이라도 자기에게 보내달라는 절규는 아닐까. 과정은 도외시한 채 결과만을 평가하려드는 세상에서, 진정한 승리를 향해 매진하여 살아가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만이 보낼 수 있는 힘에 부친 메시지는 아닐까.

뜻밖에도 오늘은 ‘땅콩 김미현 후원회’를 결성하자는 말을 들었다. 후원회가 결성되면 필자도 거기에 참여하여야겠다. 새들이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어미새의 도움이 필요하듯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영웅은 우리들의 격려와 성원 속에서만 잉태되고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땅콩에게 달러를 벌어 오라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달러를 보태 주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그래서 후원회를 만들자는 그 말이 한없이 반가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땅콩 김미현이 잘하면, 온국민이 학수고대하는 박세리의 우승도 앞당기어 올 것이요, 머지않아 박지은이 솟구쳐오르는 모습도 보게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소동기<변호사·골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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