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22)

  • 입력 1999년 5월 21일 19시 28분


형 정신이 있어 없어?

속삭이는 말투였지만 혜순이는 거침없이 야단을 치듯이 나에게 뱉었다.

무슨 일이 있었니?

일이 다 뭐야. 건이 형 달려갔어.

그게 언제야?

한 달 좀 넘었어.

그래서 전화가 그 모양이로구나.

혜순이는 한숨을 포옥 내리쉬고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러나 격렬한 울음은 아니고 나에게 편들어 달라는 식의 눈물이리라.

전화두 아예 떼어 버렸어. 주문은 직접 시장 나가서 받아오고.

어디루 간 거야?

아직 몰라. 남영동인지 남산인지…. 정자가 산발을 해갖구 사방으로 싸돌아다녀 봤는데 서로 모른대.

카톨릭 쪽으로 가 봐라. 아마 도와 줄거야.

생사람이 막 죽어 나가는 판이라 어느 단체고 꽁꽁 얼어 붙었다구.

혜순이의 설명으로 그 동안의 사고가 드러났다. 내가 서울을 떠나기 직전에 건이가 걱정했던대로 그 대학원생이 검거된 뒤에 석 달 동안이나 물 밑에서 내사를 했던 듯 싶었다. 저들은 먼저 친구들의 명단을 입수해서 그들에게 일일이 감시를 붙였을 터였다. 조원 중의 하나가 꼬리를 달고 관리 책임자인 건이를 만났고 꼬리는 다시 건이에게로 옮겨 왔을 것이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건이네 요꼬 방을 관찰했다.

어쩐지 잡상인들이 갑자기 부쩍 는 거야. 시도 때도 없이 막 문을 열어 보고, 안 산대두 가지도 않고.

그러다가 심야에 십여명이 덮쳤다. 모두들 잠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판자 문짝이 와지끈 부숴지며 작업복 차림의 사내들이 뛰어 들어왔다. 잠 자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건이에게 지휘자인 듯한 사내가 권총을 이마에 갖다 겨누었다.

누군가 불을 켜더니 다짜고짜로 몽둥이로 사정없이 팼어. 우리는 모두 골목으로 끌려나와 손을 머리 뒤에 올리고 꿇어 앉았지. 모두들 뒷 수갑을 차고 큰 길까지 끌려 나가는 동안에도 수없이 맞았다구. 우릴 마이크로 버스 닭장 차에 구겨 넣더라.

조사를 받는 동안 건이가 몇 사람의 조원을 불었고 정자와 혜순이 그리고 출퇴근하던 다른 애들은 절대로 관계가 없고 건이가 사장이라 시키는대로 돈 받고 일해 주었다고 뻗대었다.

다 끝난 게 아니야.

나는 혜순이에게 속삭였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집에 문건이 있었어?

다른 건 다 나왔는데 조직 명부는 안나왔대. 정자 말로는 훑어 간 것만으로도 엄청난 형량이 나오겠다는데?

아마 주요 문서는 최동우가 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등사기와 회의록 따위가 있었을테니까 내장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두뇌는 까발려진 셈이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최 전도사가 중얼거렸다.

자아, 열심당 여러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여. 얼른 찢어집시다.

그래 우리 먼저 일어설게. 너는 여기서 밥이나 먹구 가라.

우리는 국밥 집 안쪽을 돌아 보았고 주인 아줌마는 방 문턱에 걸터앉아 텔레비전 연속 방송극을 보느라고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내가 일어서려고 하자 혜순이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를 죽이려 애를 쓰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글: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