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삶·예술]마르크스와 청년예술가

  • 입력 1999년 5월 14일 0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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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발발하기 1년 전인 49년, 백남준은 인삼무역상이던 부친을 따라 홍콩을 여행하게 되었다. 여행목적은 부친을 위한 통역이었으며 여권의 직업란에도 ‘통역원’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여권번호가 7번인 것을 보면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다. 한편으로는 당시 17세의 소년이 무슨 통역원인가라는 의구심도 나지만 그의 생생한 기억과 활동내용을 보면 진짜 통역원 노릇을 하기는 한 모양이다.》

백남준은 홍콩여행에 관한 기억을 더듬는 어느 글에서 노스웨스트 DC4를 탔으며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보던 빨간 립스틱을 바른 금발의 미녀를 처음으로 보았다고 쓰고 있다.

비행기에 탔을 때 웬 인도인이 부친에게 다가와 농담을 건넨 뒤, 곧바로 심각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첫 통역이라서 매우 당황하여 앞뒤가 맞지 않은 채 대충 넘어갔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인도인의 직업이 무기상이었다는 점, 그리고 얼마 후 그의 부친이 싱가포르에서 온 김 아무개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가져온 짐 속에 체코 산 자동소총 등 무기가 가득한 것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 등이 글에 실려 있다.

이 글에는 또 그가 부친과 멀어지게 된 것도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로비를 해야하고 거짓말을 예사로 하는 등의 태도를 보면서였다고 서술한다.

그의 홍콩여행이 외관적으로는 통역원으로서 부친의 사업을 돕기 위한 것이었으나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은 백남준을 위하여 그의 부친이 계획적으로 마련한 여행이란 인상도 짙다.

그 이유는 우선 백남준이 이 여행에서 부친과 함께 돌아오지 않고 홍콩에 남아 로이덴 스쿨에 등록하여 다음 해 5월까지 다녔다는 점이다.

백남준은 부친이 자신을 데리고 나간 이유가 미리 준비된 것이었다면 아마도 자신이 부친이 원치 않던 예술에 심취하기 시작하였다는 점, 그리고 당시 경기중학 엘리트들의 유행병이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동경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유추한다.

백남준이 당시의 유행에 따른 것이던, 자의적인 선택이던 마르크스주의자로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그의 마르크시즘은 다분히 시대적 분위기를 동반한 감상적인 부분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가령 월북시인들의 시를 즐겨 읽고 그것을 작곡에 활용한 것과 좌파 음악인들의 작곡을 흠모한 것, 그리고 이건우를 사사 받음으로써 그의 영향이 나타난 것 등이다.

훨씬 후에 기술한 것이지만 백남준은 이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기술하는 글에서 “나는 북한군이 우리 집에 들어와 개를 모조리 잡아먹고 간 뒤부터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그 자신이 한동안 시대적 유행의 기류와 함께 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사실 북한군과 개 사건은 전쟁통에 일어난 에피소드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백남준은 이 일을 두고두고 되뇌이면서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를 풀이하는 하나의 결정적 열쇠로 사용한다.

여기에는 마르크스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른바 지식인들의 자기애적 서술과 같은 문맥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튼 20세기 한국인 소년 백남준과 아무 상관도 없을 법한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와의 미묘한 연결은 언제나 평행선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반어법은 하도 교묘하여 정신차리지 않으면 언어에 휘말릴 공산이 크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글을 보자.

“내가 지금도 마르크스주의자였다면 아마 나는 지금쯤 북한의 어느 시골에서 음악선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백남준은 그의 예술인생에서 이데올로기 문제와 거의 일생동안 마주치면서 살아온 것은 사실이다. 그가 60년대 독일 체류시기에 가담하였던 플럭서스 그룹은 거의 좌파집단이거나 무정부주의자들의 집단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왕년에 일찍이 체험하였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예술가들의 이상을 목격하면서 그 자신도 같은 부류 속에 머물고 있었다.

또 서구의 문화예술 이론가들의 상당수가 좌파 지식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그로써는 그들과의 정치적, 이념적 친분교류가 매우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80년대 후반에 그는 이러한 고백을 처음으로 표면화시켰다.

“내가 서양에 살면서 힘들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유력한 이론가들의 대부분이 좌파 지식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늘 그들의 이념적 언저리에서 침묵하였다.”

40년대 해방전후의 한국상황은 20년대에 생성된 좌파이데올로기와 독립운동이 연계되면서 나타난 좌우의 문제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좌우의 대립은 단순히 이념적인 문제를 떠나 해방공간 정치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거대권력구조로 자리한 채 양극을 달리고 있었다.

학생청년들도 상당수가 좌우로 나뉘어 대립을 하고 있었고 백남준은 이 틈에서 좌파성향의 청년이었다.

당시 경기중학은 한 학년에 3백50명의 학생이 있었으며 모두 일곱 반이 있었다. 백남준은 당시 가장 유명한 교사로 후에 한국의 대표적 학자가 되었던 철학자 안병욱선생과 사학자 천관우선생, 그리고 영문학자 김진만선생, 이명구선생을 꼽는다.

안병욱선생과 천관우선생에 대하여 그는 한 사람은 자유주의 철학자로, 다른 한 사람은 민족주의 사학자로 기억하면서 그는 마르크스주의도 민족도 이 두 스승으로부터 배웠다고 술회한다.

특히 김진만선생과 천관우선생은 반드시 한복을 곱게 다려 입고 다녔으며 한복 한번 수선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 정성이 말도 못하게 진지했다고 기억한다.

안병욱선생은 이북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부임 첫 해에 오버코트 한 벌 없이 추위에 벌벌 떨었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다. 자신이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어 백남준은 드로잉 한 점이라도 들고 안병욱선생을 찾아뵐 생각을 몇 차례 해보았으나 “창피하고 쑥스러워 그만두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만큼 그의 머리 속에는 청소년기에 영향을 받았던 스승들의 기억이 아직도 뚜렸하게 남아있는 모양이다.

말 타고 등교하거나 자동차까지 타고 다니며 남들의 부러움을 샀던 부르주아지 백남준이 프로레타리아를 옹호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부모가 걱정할 정도가 되었던 것은 한국사의 격정적 현실과 관계가 있다.

그가 이상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신봉자였든, 또는 신념에 찬 선택이었든지 간에 그의 일생 속에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논의는 항상 따라다닌다. 그의 이력서를 찬란하게 빛내는, 지식인 예술가 백남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이용우<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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