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80)

  • 입력 1999년 4월 2일 19시 13분


아버지의 마지막 몇 달은 저와의 호젓한 화해의 기간이었어요. 아버지는 마지막 한 달 동안을 빼고는 잘 누워 있지도 않았답니다. 보료를 깔고 그냥 한복 바지에 내의를 입은채로 앉아서 책을 읽고는 했거든요. 아버지의 얼굴은 점점 시커멓게 되어가고 소화 기능이 떨어져서 음식을 들지 못했어요. 마실 것만 해드렸죠. 아버지는 나중엔 잠을 많이 잤어요. 한번은 한 밤중에 아버지가 나를 찾으셔요.

윤희야, 자냐?

예 아버지….

저 문 좀 열어 봐라.

왜요, 답답하세요?

아니, 어서 열어 보라니까.

나는 잠결에 일어나서 방의 미닫이 문을 열었지요. 마루에서는 냉기가 들어올 뿐 텅 비었고 마루 아래로 우리 집의 작은 마당이 내다보였지요.

거기 누구 찾아온 사람 없니?

누가 이 밤중에 와요.

그래, 문 닫아라.

나는 영문도 모르고 다시 문을 닫았어요.

아버지 무슨… 꿈 꾸셨어요?

그게 꿈이었나보다.

누가 찾아 오셨나보죠?

응, 옛날 동지들이 왔더라. 모두들 다 떨어진 미제 군복을 입구 수염과 머리는 짐승 같이 해갖구선.

산에 계실적 친구분들 말예요?

학생두 있었구 여공두 있었구 나허구 제일 친하던 문화부 중대장두 있었는데 그 사람들 내가 잡히기 전에 환자트에서 열흘 동안 같이 누워 있던 사람들이다. 젊은 두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먼저 죽었는데 중대장은 먼저 나갔거든. 우릴 데리러 오겠다구 거적을 들치고 밖으로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보니 그도 죽은 모양이지.

아버지 과일즙 드세요. 목 마르시죠?

내가 아무래두 얼마 못 갈 모양이다. 그치들이 날 데리러 왔던가 봐.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진 지금 환자 같지두 않은데요.

입맛을 다시면 무슨 비린내 같은 게 나는구나. 나두 대강은 안다. 너희 엄만 아직두 안왔냐?

예, 설 대목이라 시장 일이 바쁘실 거예요. 내일까지 가게에 계신댔는데.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부모님들께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데요. 우리 사남매는 모두 별 걱정없이 학교도 다니구요. 제가 벌써 대학 사 학년이잖아요. 내년엔 정희가 대학에 갈 거구요.

그건 느이 엄마 공이지. 윤희야 나는 그 때, 해방 된 우리나라를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세상으로 만들려고 친구들과 같이 활동을 했다. 그런데 아직도 세상 꼴이 이게 뭐냐. 우리 몇몇이 눈보라를 헤치며 뛰어 다녔던 그 산자락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구나. 잡혀서 남원 수용소 가서 느이 큰 삼촌 시키는대로 전향서 쓰고 그리고 거기서 젊은 나는 시대하구 같이 죽어버렸어. 여기까지 이 껍데기를 끌고 잘도 버텨왔다.

아녜요, 아버진 최선을 다하셨어요.

너두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지않니.

네 어려서는 그랬어요. 아무 것두 몰랐으니까. 아버지 같은 사람들을 악마처럼 생각했거든요.

너희들이 책도 많이 읽고 세계사도 알게 되고 할 때까지 나두 아무 말 않고 기다려온 셈이로구나. 그래…세계는 끊임없이 변해 갈테지. 우리두 그런 변화의 먼지같은 일부분이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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