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74)

  • 입력 1999년 3월 26일 18시 53분


부대에서 민가가 있는 데까지 나오려면 한 시오리는 족히 걸어야 했어요. 우리는 말없이 그 길로 걸어 나왔죠. 그는 전에도 그랬지만 모든 정서가 다 새어나가 푸석푸석한 연탄재 같이 보일 정도였어요. 손은 얼어 터져서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구요. 나는 마치 그의 엄마라도 된 듯한 심정이었지요.

무슨 면이래나 중앙통이 한 이십여 미터 밖에 안되는 마을에서 여인숙이라는 델 들었어요. 무늬가 요란하고 어른거려서 그렇지 새로 도배한 방에 들었는데 장판은 비닐이고 아랫목이 연탄 아궁이 덕택에 까맣게 탔지요. 그래두 면회 온 사람들이 여러 차례 들렀던지 주인 여자는 우리의 모습에 아주 익숙한 듯 했어요. 목욕두 하래요. 욕실은 부엌 옆에 세면장이 따로 있었는데 옛날 식으로 아궁이 위에 커다란 무쇠 욕조를 얹어 놓고 밑에서 장작불을 넣는 식이었지요. 욕조 안에다 널판지를 깔아 물 속에 몸을 담글 수도 있는 그 일본식 말이예요. 그리고 세면장 안에는 맨발로 물을 끼얹을 수 있게 역시 판자를 깔아 놓았어요. 큰 함지도 있고 작은 바가지들도 있어서 내가 먼저 목욕을 하고 나와서 나는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당신에게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 날 나는 처음으로 그의 벗은 몸을 본 셈이었어요. 구두솔 보다 더 뻣뻣하고 억센 짧은 머리를 그가 말했듯이 말표 빨래비누로 감지않고 럭스 비누로 감아 주었죠. 그의 머리는 물론 몸에서는 땀 냄새와는 다른 홀아비 냄새가 났지요. 그건 이를테면 누린내 비슷하기도 하고 오래 묵은 쉰 밥내 같기도 하고 거기에 간장이 섞인 듯한, 남자들의 고독에 찌든 내음이었어요. 등을 밀었더니 밥풀 같은 때가 줄 지어 떨어지더군요. 나는 그의 손을 대야의 뜨거운 물에 담가 불리게 하고는 빨강 이태리 타올로 박박 밀어 주었어요. 그가 엄살을 부리며 연신 손을 뒤로 빼고 하면서 소리를 지르더군요. 나는 그의 등덜미를 철썩 철썩 때리면서 씻겨 주었구요.

나는 그를 내 가슴에 안아 주었어요. 아버지와 작별하던 생각이 나서 눈물을 찔끔거렸구요. 내가 처음 겪는 일 때문에 우는 줄 알고 그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그랬는데 웃음이 나올까봐 혼났어요. 울다가 웃으면 어찌 된다는 우스개 소리두 있잖아요. 새벽 동이 훤하게 트고 있었는데 그는 이미 깊은 잠에 떨어져서 나직하게 코를 골고 있었구요. 나는 그의 돌아누운 등 뒤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면서 그의 어깨너머로 밝아오는 창호지 문을 바라보았죠. 나는 이 친구와 헤어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이제 이만큼 나이 들어 돌아보면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를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사랑한 건 아버지의 빛나는 젊은 시절에 대한 막연한 상상이었을 거예요. 내게는 그의 어두운 젊음이 낯설지 않았고 그냥 그를 어루만져서 내 속을 달래려고 한 것 뿐이예요. 나중에 그건 사실로 드러났으니까요.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임용고사 치르고 서울 변두리에서 교사를 하고있던 해에 그가 제대를 했지요. 그는 제대 하자마자 나를 찾아 왔어요. 그로서는 당연했겠지요. 나와 결혼하길 원했거든요. 나는요, 정말이지 그냥 그랬어요. 그는 내가 예상했던대로 공모전에서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어요. 선배들의 경향이나 작단 분위기도 대번에 파악을 했어요. 그는 최고의 대상을 일년 반 동안에 세 번이나 휩쓸었지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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