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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3월 22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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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것들을 그려야 순발력이 생겨요.
나는 그의 화첩에서 방금 잡아올린 인물들의 생생한 자세를 보면서 난간에서 돌아섰어요. 그리고 길을 건너 중앙시장 안으로 들어갔지요. 리어카에서 과일 상자를 내리고 있는 두 남자를 발견하고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동작이 순식간에 바뀌고 마는 거예요. 그래도 처음 잡은 구도대로 선을 그어 나갔죠. 그러곤 돌아서서 이번에는 동작이 그리 크지않은 풀빵장수 아줌마를 그렸어요. 표정은 같은데 두 손의 손놀림이 빠르게 변했어요. 아무래두 그게 안돼서 두 손목 부위만을 여러번 그렸죠. 그런 식으로 나는 시장 안에서만 이십 점을 그렸구요. 다시 큰 길로 나와 노점상들이며 지나는 사람들과 군상들을 빠르게 소묘해 나갔어요. 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더군요. 나는 족히 삼십분 쯤을 염천교 다리 위에서 기다렸는데 그가 낡은 군화를 터덜거리며 나타났죠.
이젠 좀 쉬어야겠어요. 학교루 돌아갈까 하는데….
먼저 가 보슈. 난 요 근처에 들를 데가 있어서.
그런 법이 어딨어요. 출발 지점으루 데려다 줘야죠.
일부러 나는 그렇게 말했죠. 기실 학교로 돌아가 봐야 수업은 다 끝났을테고, 이제는 집으로 갈 시간이었지만 엄마가 시장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돌봐 드려야 할테니까요. 정희가 먼저 집에 돌아올 무렵이니까 나는 아홉 시 쯤에 들어가면 그냥 아버지께 말 동무나 해드리면 되거든요. 그런데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장을 서는 거예요.
까짓 거, 내가 버스 정류장까지는 데려다 주지.
그래서 이번에는 이쪽에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흔들었죠.
싫어요. 오늘 저녁 아홉 시까지 거기서 책임을 져야 돼요. 내가 저녁은 살게요.
허, 야단났네 이거….
그는 짜증도 내지않고 정말 순진하게 머리를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내게 불쑥 물었어요.
돈 있는 거 다 꺼내 보슈.
뭐땜에…?
하여튼 그 가방 좀 봅시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정말, 그는 다짜고짜 내가 어깨에 걸쳐 메고있던 자루처럼 생긴 가죽 백을 나꿔채는 거 있죠? 나는 반사적으로 끈을 움켜쥐고 뿌리치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어요.
얼마나 있소?
그날따라 내게는 학생 용돈으로는 제법 많은 돈이 있었어요. 그 지난 주에 나는 아르바이트로 받은 월급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지요. 미대 입시생 개인지도를 해주고 있었는데 그 집 얘기며 그 아이 얘기는 나중에 할게요.
충분히 있으니까 걱정말아요.
그랬더니 그는 고갯짓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해보이며 시장 안으로 들어갔어요. 푸줏간에서 돼지고기 삼겹살 두어 근 사고, 쌀도 사고, 두부, 파, 고춧가루, 갖은 양념도 사고, 사홉들이 소주를 네 병이나 샀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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