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55)

  • 입력 1999년 3월 4일 19시 38분


윤희의 노트를 읽다말고 잠들었는데도 나는 대밭의 참새 떼가 우짖는 소리로 일찍 잠이 깼다. 일어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격자문의 창경에 얼굴을 갖다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침 안개가 마당을 꽉 채우고 그 너머로는 온통 새하얀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저 안에서 해온 습관대로 웃통을 벗고 마당에 나가 수도를 틀었다. 머리부터 찬 물을 뒤집어 쓰고 천천히 등을 수도꼭지 아래로 들이밀었다. 견딜 수 없는 오한이 등과 가슴을 싸안았다. 그러고는 젖은 수건으로 상반신에 열기가 느껴질 때까지 부벼댔다. 그런 때에는 내 몸과 정신이 아직 살아있는 듯 하고 거울을 보지않는한 청년인 것만 같았다.

밥 먹으러 오래여.

돌아보니 대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가 수줍은 듯이 감나무 뒤에 숨었다가 고개를 내밀어 보는 중이었다.

너 누구니, 이리 와 봐라.

아이는 핑 돌아서서 달아나지는 않고 여전히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말했다.

나 문보람.

나는 얼른 속옷과 셔츠를 걸치고는 뜰 아래로 돌아서니 어느 결에 아이는 깡충대며 오솔길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아랫집에 들어서자 부엌에서 내다보던 순천댁이 한 손을 저어 보이며 말했다.

방으루 올라가요.

남도식 일자집의 왼쪽 끝에 찬방이 있고 찬방은 부엌과 통해 있었다. 찬방 앞에서부터 마루가 끝까지 이어졌는데 줄줄이 방이 붙어 있기 마련이다. 찬방 옆이 안방이고 부엌 아궁이가 안방 쪽에 나있다. 안방 옆에 곁문 달린 대청이 있으며 그 옆에 아이들 방이 있고 그 옆 마루의 끝에 바깥 어른이 기거하는 사랑방이 달려 있었다. 생전에 교감 선생은 그 방에서 나와 바둑도 두었고 이야기도 나누곤 했다. 그쪽 방문이 열리며 이 집 막내인 옛날의 토끼가 마루로 나섰다.

안녕히 주무셨소. 올라 가시지요.

나는 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찬방으로 올라갔다. 찬방에는 둥근 상이 차려졌고 벌써 찬 식기들이 올라와 있었다. 막내 며느리는 부엌에서 취사를 하는 어머니를 거드는 중이었다. 부엌도 예전의 흙 바닥이 아니라 타일을 깔고 실내 수도를 들이고 싱크대를 놓았으며 가스 레인지를 쓰고 있다. 국이 들어오고 밥은 전기 밥솥에서 조그만 공기에 퍼서 올라왔다.

찬이 입에 맞을랑가 모르것네. 냉이국 좋아하지라?

예, 그럼요. 솜씨는 여전하시지요?

몰러, 다 잊어부러서 어치케 하는 중도 모르제. 된장 맛으로 묵소.

막내가 뭔가 주춤대더니 부엌의 여자들이 듣지못하게 목소리를 죽여서 말을 꺼냈다.

저어, 아저씨 이따가 누가 점 보자고 합디다.

누가… 나를?

이예 저 머시여 서에서 나와 본다구 허든디. 잠깐 만나서 멋 점 물어본다고.

그러겠지.

나는 그가 어제 저녁에 이곳 구역 담당자에게 전화를 먼저 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아마 순천댁이 먼저 걱정 끝에 안을 내었으리라. 그렇지 않겠는가. 문 교감 부부가 당시에 내가 서울에서 검거 되고나서 물론 윤희가 참고 조사를 받았겠지만 그들도 관내 경찰서에서 혼찌검이 났을 터였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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