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9)

  • 입력 1999년 2월 2일 19시 28분


그네는 표정이 바뀐다. 눈가에 어두운 그늘이 생기고 지겹다는 듯이 입은 약간 벌어지며 고개를 내젓는다.

용서할 수 없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지만요.

아버지요?

아뇨…아버지는 평생 술만 드시다가 돌아가셨죠.

그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윤희의 눈에 불그레하게 물기가 도는 것 같았다.

역사적인 상처가 있는 분이셨어요. 우리 그런 얘기 그만하죠. 그보단 왜 내 질문을 피해 가시려는 거예요?

무슨….

신변 문젤 제게 맡기려면 자기 얘길 해주셔야죠. 본명이 뭐냐, 학생은 아닌 것 같으니까 직업이 뭐냐, 무슨 일을 했느냐, 즉 잠수의 원인이 뭐냐, 그런 걸 알구싶은 게 당연하잖아요?

네 당연하죠.

하고나서 나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제 이름은 오현우라구 합니다. 나이는 서른 두 살 먹었구요. 재작년까지는 시골 중학교에서 한 선생처럼 교직을 갖구 있었죠. 대학 시절에는 학생운동을 했습니다. 잠깐 징역 살구 강제 징집으로 전방에서 군대 생활을 했구요. 나머지는 천천히 알려 드릴게요.

어머, 그렇게 많은 사연을 단숨에 말해버릴 것을.

우리는 식당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직도 운전수가 없는 채인 택시로 가서 뒷자리에 나란히 올라탔다.

이래두 되는 건가?

하고 내가 불안하게 두리번거리자 윤희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마 곧 나타날 거예요. 그런데 물론 미혼이겠죠?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유니폼의 상의만 걸친 택시 운전기사가 천천히 걸어 오는게 앞창으로 내다보였다. 그네는 재빨리 말했다.

이제부턴 저만 말할 게요.

기사가 우선 손님들을 살피고 나서 앞자리에 앉았다. 윤희는 행선지를 말했고 나는 눈을 감고 자는 척하고 있었다. 차는 꽁무니에 구름 같은 먼지를 날리며 비포장 도로를 달려 고개를 넘어갔다. 목적지란 바로 이웃 군이었는데 한 이십분쯤 걸렸다. 읍내 어느 곳에나 비슷하게 생긴 차부에 당도하자 우리는 택시에서 내렸다. 윤희는 차부를 벗어나 읍내 어디에나 있는 중앙통을 앞서서 내려갔다.

여기서 버스를 갈아타는 게 낫겠어요. 택시를 타고 그냥 가두 되겠지만요. 직행 버스를 타면 우리 학교까지 한 사십분쯤 걸릴 거예요.

지금 어디루 가는 거요?

따라만 오세요. 무릉도원이니까.

저녁에만 여는지 문을 굳게 닫은 퇴락한 창고 같은 영화관이 나왔다. 우리는 극장 앞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윤희가 말했다.

스케치하러 돌아다니다가 찾아냈죠. 거기 제 작업실두 있어요.

그러면 일루 옮기지 그래요. 학교까지 멀지두 않다면서.

곧 그럴 생각이에요.

버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버스에는 무싯날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 몇 명과 아낙네 서넛이 각자 한 좌석에 한 명씩 떨어져 앉아있을 뿐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버스가 떠났고 차장 소녀가 비틀대는 걸음으로 표를 끊으러 다가왔다.

어디요?

갈뫼 두 장.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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