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7)

  • 입력 1999년 1월 19일 19시 20분


제가 당신에게 맛난 걸 장만해 드리려고 주방을 설쳐 다니다가 돌아와 보면 베란다 문이 활짝 열려 있고 현관 문도 휑하니 열려 있고 바람이 불어 들어와 커튼을 한껏 부풀리고는 펄럭대고 있었어요. 당신은 벌써 가버린 거예요. 어떤 때는 우리가 바닷가에 놀러 가기두 했죠. 당신이 그랬잖아요. 검문소가 없는 저어 땅끝 마을에 가서 그물도 꿰매고 해초도 건져 올리면서 며칠을 보내고 저녁 때엔 아궁이에다 감자를 구어 먹자구요. 바닷가에서 망망한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니 당신은 휘적휘적 산 길을 돌아가구 있었어요. 제가 한참이나 부르는데도 한번도 돌아보지 않고. 그게 당신의 갇힌 영혼이었나요?

병원에 다녀와서 다시 편지 할게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당신이 먼지 같은 이쪽의 삶으로 돌아올 때까지 저는 이렇게 정지되어 있어요. 다시 기운이 펄펄나게 되살아날 거예요.

1995년 11월 윤희.

아, 그로부터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저도 놀랐어요.

그러니까 이 병원에 오기 전 날 당신에게 편지를 했었지요. 당신을 잊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처음엔 좀 놀랐죠. 별로 슬프지두 않았어요. 한윤희가 암이래요. 이미 많이 진행이 되었답니다. 팽팽한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 나가듯이 제 육신이 차츰 줄어들고 있어요. 그런데두 정신은 더욱 말짱해서 이 곳의 진절머리나게 긴 밤이 오면 저는 갈뫼를 생각하죠. 모든 것을 구석구석 다 생각하고나서 이제는 아주 작은 기억의 파편들까지도 그러모았다고 자족하고는 잠이 들어요. 헌데 이튿날 밤이 되면 그 중에서도 잊었던 일들이 더 보태지곤 해요.

기억나세요? 과일창고 뒤편에 으시시한 시누대 밭이 있는 어둠 속에 있던 뒷간 말예요. 엉뚱하게 크고 널찍하게 지은 나무 기둥에 흙벽을 바른 그 집. 징그럽게 큰 귀뚜라미가 떼를 지어 살았죠. 널판자 아래 오물 칸은 아득하게 깊어서 일을 보면 한참만에야 소리가 들린다고 당신이 너스레를 떨었죠. 한밤중에 제가 배탈이 났잖아요. 그건 수박 때문이었을 거예요. 당신을 졸라서 손전등을 들고 함께 갔어요. 저는 어린 날로 돌아간 느낌이었어요. 당신도 알죠. 내가 맏딸이라는 걸. 저는 열 살이 넘어서는 뒷간에 혼자 가거나 동생들을 따라가서 문 밖을 지키고 서서 두려움을 참아야만 했지요. 아버지는 그 때도 늘 소주에 취해 있었거든요. 엄마는 장사 나가서 언제나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서야 돌아왔지요. 그러니까 제가 어렸을 때라고 하는 건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에요. 아부지 거기 있어? 응, 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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