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구 칼럼]국회라는 이름의 블랙홀

  • 입력 1998년 12월 18일 19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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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국회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지고 준엄하게 꾸짖는 ‘논고문’을 보내온 독자가 있었다. 또 본보 여론독자부에 걸려온 전화 가운데는 이런 내용도 있다. “정치인들이 싸움박질하는 내용을 왜 시시콜콜 보도하는가. 지면이 아깝다. 무시해 버려라. 차라리 생활뉴스 법률정보같은 일상에 도움되는 기사를 많이 실어달라. 정치판의 티격태격이 정말 지겹다.”

▼ 전혀 바뀌지 않는 정치

‘국회’하면 이젠 내놓은 자식처럼 “꼴도 보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정치학교수는 여당을 비판하고 싶어도 야당의 작태가 한심해서 못하겠고, 야당을 나무라고 싶어도 기고만장한 여당이 보기 싫어 못하겠다며 머리를 저었다. 결국 양비론(兩非論)이 안나올 수 없게 돼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 IMF시대에 모든 것이 다 변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전혀 바뀌지 않는 곳이 정치고 국회다.

여당은 늘 여당, 야당은 언제나 야당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는 아예 여당체질 따로 있고 야당체질 따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서로 입장을 바꿔본 경험이 없으니 역지사지(易地思之)도 어려웠다. 여당경험있는 야당, 야당경험있는 여당을 한번 가져본다는 것은 오랜 숙원이었다. 여당을 하면서도 야당시절을 잊지 않고 야당을 하면서도 여당시절을 생각한다면 피곤한 정치싸움이 왜 일겠는가.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정치풍토는 판이해질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믿었다.

바로 1년 전 그 기회는 왔다. 선거를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로 우리도 야당경험을 가진 여당, 여당경험을 가진 야당을 갖게 된 것이다. 대선 직후 입장이 뒤바뀐 여야가 건전한 여당, 책임있는 야당을 국민앞에 다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제야 말로 정치의 새 모습을 볼 수 있겠거니 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며칠이 못가 환상이고 착각임이 드러났다. 한국의 정당들은 모처럼의 정치실험을 성공으로 이끌기에는 턱없이 수준미달임이 증명된 것이다.

▼ 美의회를 보고 배워야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공수(攻守)역할만 맞바꾸었을 뿐 정치행태는 옛날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미운 시어머니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은 있지만 과거의 상대방을 어쩌면 그렇게도 쏙 빼 닮았는지 신통하기도 하고 희한하기도 하다. 야당의원 빼내 여대(與大)만들기, 승산있으면 표결처리, 수틀리면 퇴장작전, 다수의 밀어붙이기에 소수의 연계전략, 급기야 의장실점거 원천봉쇄 작전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인 작태란 작태는 모조리 다 등장해서 재연되고 있다.

승자의 관용과 패자의 승복, 다수의 포용과 소수의 분발은 정치세계의 변함없는 미덕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정치는 그런 합리나 이성보다 상대방 길들이기와 감정싸움이 판을 친다. 당신들 집권시절 그 오만과 독주에 우리가 얼마나 수모를 당했는지 아는가.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당신들 야당할 적에 걸핏하면 발목잡기로 우리를 얼마나 골탕먹였는가. 지금 그것을 되돌려 줄테니 어디 한번 당해 봐라. 이런 보복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 의회의 다수 야당인 공화당은 클린턴대통령이 이라크 공습에 나서자 그에 대한 탄핵안처리를 연기했다고 한다. 국익 앞에 정쟁을 자제하는 그들의 이성이 부럽기도 하지만 우리가 주목하는 대목은 민주적 절차에 철저한 미 의회의 일처리 방식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그런 엄청난 사안이 불거졌다면 아마도 국회는 지금쯤 아수라장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의회에는 다수의 밀어붙이기도, 소수의 원천봉쇄나 실력저지도 눈을 씻고 봐야 찾아볼 수가 없다.

▼ 개혁-민생 어디로 갔나

우리 국회는 마치 거대한 블랙 홀 같다고 누군가 말했다. 국회에 가면 모든 것이 실종돼 버린다는 것이다. 개혁도 정의도, 민생도 희망도, 심지어 참과 거짓까지도 거기에 가면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국민대표들이 모였다는 국회가 계속 이 모양이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 우리에게 밝은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다.

이제부터라도 여권은 과거 야당시절을, 야당은 여당때를 생각하며 자세를 바꿔야 한다. 또 언젠가는 여야가 다시 뒤바뀔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고 정치를 한다면 지금같은 구태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여당이 4년 뒤에는 다시 야당을 해도 좋다는 각오로 임한다면 이 실망스러운 분위기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남중구(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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