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사람들]「5일장」인기…「행신 민속場」 성황

  • 입력 1998년 11월 15일 19시 53분


“5백원만 더 깎아줘요.”

“아이고 답답하네. 이것도 거저 가져가는 거여.”

결명자가 있고 시골된장이 있다. 복(福)자가 새겨진 화문석 반짇고리가 있고 박자가 어색해 더 귀기울이게 하는 정감있는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도 있다. 그리고 장터국수까지….

12일 오전 11시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무원마을. 말이 마을이지 주변은 아파트로 둘러싸인 이 곳 5백평 남짓한 공터에 ‘장’이 섰다.

행신 5일장이다. 경기 포천 파주 문산 일산 일대의 ‘장돌뱅이’ 60여명이 모였다. 경제난의 틈새를 비집고 도시적 분위기의 아파트단지에서 되살아난 장터. 하루 2천여명의 아파트 주민이 몰릴 정도로 인기다.

현재 경기 일대에만 20여개가 성업중인데 행신 민속장은 2, 7일과 12, 17일에만 서는 2,7장이다.

“값도 싸지만 생선 채소가 싱싱해서 와요. 냉장시설이 좋은 백화점은 얼마나 지난 건지 모르잖아요. 노천에 그대로 내놓고 파는 여기는 신선하지 않은 건 팔 수가 없죠.”

박희옥(朴熙玉·47·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주공아파트)씨의 말마따나 저렴한 가격과 신선도가 민속장의 경쟁력. 그러나 더 큰 매력은 ‘에누리 없는 장사가 없다’는 옛말을 실감할 수 있다는 점. 바코드에 찍혀 나오는 가격으로 흥정이란 아예 사라진 대형매장과는 다르다.

“나이 많은 손님은 한 2할 정도 깎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혹독’해요. 절반 이상 깎고는 그대로 하자고 생떼를 씁니다. 물건을 담는데도 1백원 더 안깎아 준다고 홱 가버리고….”

9년째 밑반찬을 팔고 있다는 최길남(崔吉男·50)씨의 말. “요즘엔 남편들이 주부보다 더 ‘악착같이’ 깎는다”며 웃었다.

해 뜨면 서고 해 지면 닫는 민속장. 단골도 만들기 어려운 장꾼들이지만 인심은 후하다. 행신민속장 상인들은 1천원 혹은 2천원씩 갹출한 돈으로 인근 아파트 노인들에게 장터국수 한그릇씩을 무료로 대접한다. 특히 해질녘 ‘떨이’때는 후한 인심이 극에 달한다. ‘먹고 살 만큼만’ 팔고 나면 이내 인정이 발동하는 모질지 못한 심성이 주부들을 유쾌하게 한다.

그러나 장터에도 변화는 있다. 요즘 배달 안해주면 아예 사지도 않는 아파트 주부들 때문에 장터상인들은 배달까지 책임진다. 또 최근엔 직장을 잃고 장돌뱅이로 나선 넥타이부대도 심심찮게 있다.

아침 ‘개시’의 신성함도 알지 못한 채 이것저것 만지다 사지도 않고 홱 돌아서는 주부들의 무딘 감정이 행여 첫손님을 귀히 여기는 장꾼들의 마음을 언짢게 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면 하는 게 여기 상인들의 바람이다.

〈고양〓이승재기자〉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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