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32]집단소송제도

  • 입력 1998년 10월 13일 19시 12분


72년 미국은 ‘그랜스버우 대(對) 포드자동차’ 소송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소송 대상인 포드의 핀토는 연방안전기준에 맞게 설계됐을뿐 아니라 민간 연구소의 안전검사에서도 합격판정을 받은 차였다. 그러나 좌회전 깜박이를 켠 상태에서 후진하면 여지없이 폭발 사고가 났다.

핀토의 피해자 그랜스버우가 대표로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핀토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없는데다 ‘미국인의 자존심’으로 통했던 포드라는 거대기업이 ‘개미군단’에 질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포드의 비리를 폭로하는 내부 보고서가 증거로 제시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안전장치를 부착하는 비용이 탑승자의 사망이나 상해시 물어줘야 하는 보상금보다 많다는 계산에 따라 포드는 문제의 차를 그대로 시장에 내다 팔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 결국 포드는 막대한 손해배상금을 물어줘야 했다.

포드의 핀토 사건은 소비자 구제를 위한 집단소송의 전형으로 이 제도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첫째,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그랜스버우 한 사람이지만 판결의 혜택은 핀토의 피해자 전원에게 돌아갔다.

둘째, 포드는 소비자 피해 배상금보다 훨씬 많은 ‘징벌적’ 배상금을 물었다. 피해자에 대한 배상금은 2백50만달러였지만 징벌적 배상금은 이보다 많은 3백50만달러(1심에선 1억2천5백만달러)였다.

포드는 패소후 구겨진 기업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포드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집단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시민단체들에 연간 2억달러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시작했다. 이것이 집단소송제도의 세번째 특징이다. 즉 기업들이 스스로 ‘나를 감시해달라’며 시민단체들을 지원, 이 제도가 빛을 발하게 하는 것이다.

집단소송제는 60년대 시민의 권리찾기 운동이 봇물을 이루던 미국에서 생겨 유럽으로 수출됐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이 차관 제공의 조건으로 이 제도 도입을 요구할 정도로 소비자 보호를 위한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나라마다 운용방식은 다르다. 독일의 경우 개인이 아닌 시민단체만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있다. 사회주의 색채가 짙은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들은 시민을 대신해 국가가 기업이나 정부부처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한다

일반소송 외에 집단소송제도를 별도로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 과자 포장지에 표시된 용량과 실제 용량이 다르다면 소비자 한사람이 손해보는 것은 몇십원에 불과해 소송까지 하지는 않지요. 오염된 수돗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피해원인을 밝혀내기도 어렵고 피해액을 가늠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큰 비용을 내가며 소송을 제기할 엄두를 내는 못하지요. 이처럼 잘게 쪼개져 개개인에게 흩어져 있어 침해받기 쉬운 사회적 권리를 효율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집단소송제입니다.”(황승흠·黃承欽 아주대 강사)

집단소송에 휘말린 기업들은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기도 한다. 올 7월 세계 최대 실리콘 겔 생산업체인 미국의 다우코닝사는 실리콘 겔 유방확대 수술 후 부작용을 이유로 집단소송을 제기한 세계 각국 여성 17만명에게 모두 32억달러의 손해배상을 해주기로 합의했다. 이 소송엔 우리나라 여성 1천여명도 참여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민들의 권리찾기운동이 활발해졌다. 교통체증을 일으킨 할인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신도시 주민들, 경영진에게 부실 경영의 책임을 묻는 소액주주들, 지하철 7호선이 관리부실로 침수됨에 따라 시간적 물질적 손해를 봤다며 배상을 청구한 승객들….

그렇지만 우리나라엔 집단소송제도가 없기 때문에 작은 권리를 법적으로 효율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봉쇄돼 있는 실정이다.

참여연대는 올 여름 집중호우로 피해를 본 서울과 경기 북부 이재민들을 모아 수방대책을 소홀히한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준비중이다. 처음엔 75명의 피해자가 소송에 참여하기로 했다가 현재는 15명으로 줄어든 상태다. 챙겨야 할 서류가 많고 비용도 많이 드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소송을 포기했다. 원고 한사람 한사람이 일일이 소송을 내야하는 현실 때문에 ‘집단소송’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됐다.

도시연대는 전국의 교통사고 다발지역을 집중 조사, 도로설계나 관리상 잘못으로 인한 교통사고를 추려내 소송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1백명에 가까운 원고의 인적사항을 정리하는 등 준비작업에만 서너달이 걸리고 인지대도 수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여 소송 제기 자체가 불투명한 상태다.

“잘못된 제품이나 제도 때문에 시민들이 피해를 입어도 돈많은 기업과 권력 기관을 상대로 싸울 무기가 없습니다. 집단소송제를 통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이 없는 한 소비자는 영원히 ‘봉’으로 남을 수밖에 없어요.”(최정한·崔廷漢 도시연대 사무총장)

〈이진영기자〉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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